판례 읽어주는 남자 (9.5기 인턴 김동규)

2015년 7월 28일

2015. 7. 1. ~ 2015. 7. 29. 약 4주간의 기간은 아마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판례가 내 눈, 뇌, 손을 거쳐 간 기간이다. 약간의 과장과 조금의 축소를 보태서 300개 정도 되는 판례들을 살핀 것 같다. 원고의 주장과 법원의 판단을 데이터베이스에 타이핑하는 작업은 내 두 팔을 앗아갔지만, 팔 근육의 수고로움 이상의 것들을 남겨주었다. 판례가 남겨준 것들 중 몇 가지를 무겁지 않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

#오리엔테이션에서 진지하게 질문을 하고 있는 김동규 인턴

1. 난민판례의 난민이야기

먼저 난민판례들은 그 자체로 생소했다. 심지어 ‘난민불인정처분취소의 소’와 같은 태어나 처음 보았다. 사건명뿐만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종전에 자주 보던 재산권 판례들과는 다른 생소함이 있었다. 난민판례 속에는 저당권과 부동산 판례에는 없는 ‘사람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대개 원고의 주장을 통해 당사자의 이야기를, 인정사실을 통해 객관적인 상황들을 읽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난민신청을 하고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지역의 나라에서 난민신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해당지역의 국가들이 놓인 상황이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막연하게 아프리카는 어려운 나라, 내전과 질병이 많은 나라 정도로만 생각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사건을 보니 이렇게 많은 분쟁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사람들이 죽어가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인지도 몰랐다. 판례로도 이 정도인데, 현실은 어떠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고 무장단체로부터의 위협, 종교적 분쟁으로 인한 테러, 종족을 이유로 한 생명신체의 위협에 매일 매일이 노출된 삶은 감히 공감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밖에선 같은 ‘사람’인데도 너무 다른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땐 무언가 불편함마저 들었다. (예를 들면, 내가 무얼 먹을까를 고민하는 순간에 누군가는 어떻게 안 죽을까를 고민하고 불안해해야 한다는 점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판례 속에 난민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어쨌든 이는 법률 요건에 맞추어 일정한 법적 권리와 지위를 청구하는 이야기이므로 매우 건조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건조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난민의 어려운 지위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데, 하물며 진짜 ‘real world’에서 우리가 난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우리 몸에 스며들까, 판례 밖의 실재(實在)가 더 궁금해졌다.

2. 기각 기각 그리고 기각

많은 판례들을 보면서 판례의 태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판례는 난민인정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 보수적이란 것을 개개의 판례를 보면서 더 느낄 수 있었다. 판례DB에 판결결과를 입력하는 칸은 굳이 판례를 보지 않고도 ‘청구기각’버튼을 누르면 될 정도로, 난민판례에 대해 원고의 청구를 들어준 사건은 거의 없었다. 물론 당사자들의 청구가 이유 없어 당연히 기각되어야 할 것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난민협약, 난민의정서 상의 난민인정기준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판례의 난민요건 해석과, 당사자 및 그 국가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좀 더 타당성을 갖추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외국인, 난민이라는 지위만으로도 충분히 열악한 지위에 놓여있는데, 법원에서도 그들의 입장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부분들이 아직까지 판례의 한계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라 생각된다. 다만, 긍정적인 부분은 최근의 판례는 난민의 지위인정에 대해, 외국인의 처우에 대해 보다 인간의 권리에 대한 차원으로 접근, 또는 불명확함으로 인해서 인권이 침해되었던 부분들에 대해 명확하게 판시를 해 나감으로써 이러한 아쉬움들을 조금씩 극복해 가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물론 법원에서 인권적 차원에서 이러한 판시가 나오는 것인지, 법리적 고려에서 이러한 판시가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면, 종전의 외국인의 출입국에 관해서 행정절차법의 배제를 인정하여, 행정청의 고지의무라든가 사전통지의무 등은 외국인들에게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를 배제하여 외국인의 출입국에 관한 사항에도 행정절차법이 적용된다고 명시한 판례도 볼 수 있었다.

이런 부분들은 아마도 기존의 아쉬움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판례의 노력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이러한 흐름이 부디 점점 더 난민판결에 잘 녹아들었으면 한다.

#한달 내내 이 자세로 판례를 읽어내려갔던 김동규 인턴의 모습

3.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민들

어필에 오기 전 ‘한국판 터미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댓글엔 난민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들이 다수였다. 조금은 의외였다. ‘인권~ 인권~’ 하던 대한민국 사람들이 유독 난민사안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을까? 반대하는 입장에서 제시한 이유도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물밀 듯이 들어올 것에 대한 불안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열을 올리고 반대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보다 개인적으로는 합리적인 대화, 건강한 반대의견의 제시라기보다 ‘일단 반대, 무조건 반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불편함이 어디서 왔으며, 난민인정에 대해 보다 건강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들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1) “난민에 대해 모른다.” 한 사회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은, 그 약자를 지칭하는 단어의 의미가 사회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알려져 있는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표적으로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여성’, ‘장애인’에 대해서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 각자가 인지하고 있는 바가 있고, 그에 따라 우리는 어떠한 행동과 태도를 취하게 된다.(ex. 배려와 존중, 차별적 언행의 조심 등) 이러한 점에서, ‘난민’들이 놓인 처지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우리가 ‘난민’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난민의 개념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이고, 알더라도 ‘난민=문제가 있는 외국인’, ‘난민=불법체류자와 유사한 외국인’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는 지금의 난민에 대한 거부감, 갈등을 적절하게 해결해 나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난민의 어려움과 ‘난민’ 자체에 대해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보게 되었다.

2) “난민신청을 욕심이라 생각한다.” 난민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난민신청을 마치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세금과 내 이익이 박탈되니 난민은 받아주면 안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말이 맞기 위해서는, 난민에게 일단 기본적으로 현재에도 보통의 삶이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더 나은’이라는 표현이 난민신청에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난민들의 실상은 현재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하나의 예로, 탈레반에 끌려가거나, 혹은 죽임당하거나, 혹은 탈레반에 합류하거나 하는 선택지가 놓인 삶이 과연 인간다운 삶일까?)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보트에 타려고 하는 게 더 나은 삶을 위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난민신청이 더 나은 지위를 얻기 위한 욕심,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초적인, 최소한의 간절한 바램.’이라고 인식되고 논의될 수 있도록 프레임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9.5기 김동규 인턴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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