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HCR 심은아 컨설턴트와의 만남 후기

2014년 1월 13일

아프리카에서 갓 잠시 동안 입국하신 유엔난민기구(UNHCR)의 컨설턴트 심은아 씨께서 1월 13일 이른 아침부터 어필을 찾아주셨습니다! 김종철 변호사가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님과 유럽의 난민제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유럽에 다니실 때 영국에서 만나서 함께 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떠올리시며 즐거운 에피소드도 알려주셨는데요, 심은아 씨는 즐거운 입담에 못지 않게 다이나믹한 인생을 사신, 그렇지만 아직 꽃다운 청춘을 누리고 계신 멋진 분이셨습니다.

* 아래에서는 심은아 컨설턴트께서 여태까지의 여정과, 세계 각국에서의 UNHCR 근무경험, 국제기구의 실제에 대한 설명들을 자세하게 나눠주신 것을 요약, 편집하여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여정..

간디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선생님들께 홀로서기, 자립심을 배웠습니다. 대체수업을 통해 서울에 올라와서 대기업 다니시는 분들께 영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었고 배낭여행을 다녔으며, 한국 UNESCO에서도 연락이 와서 아직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문화교류(cultural exchange)에 관해 활발한 활동을 할 기회가 고등학교 때부터 많았던 것 같아요.

고3 때 진로고민을 하던 중 수시모집으로 대학에 붙었고, 그 동안 모은 돈으로 해외배낭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떤 용기로 떠났는지 모르겠지만, 가이드북, 예방접종, 여행자보험 전혀없이 지도 한 장만 들고 무작정 떠났어요. 책을 보고 단순히 색감이 참 이쁘다고 생각한 네팔을 여행하다가 어떤 기독교 단체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과 지내기도하고, 그 다음엔 티베트로 넘어갔어요. 이때 미리 준비를 하지 않은 탓에 병에 걸려서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다행히 누군가가 병원에 데려가서 가까스로 생명을 구했죠. 중국과 조선 자치구를 여행할 때는 간디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에 갔었고, 간디학교 교장, 선생님들과 탈북자들을 만나고 북한 국경도 멀리서 바라본 기억이 있어요.

열 여덟 살에 떠난 이 여행에서 신기하게도 난민들을 많이 만났었고 왜 이 사람들은 고통받는지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 외에도 국가, 난민, 무국적자, 인권, 이주노동자 등 그 전에는 생각치 못한 다양한 개념에 대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월화수목금토일 시간을 쪼개서 15개 정도의 다양한 인권분야의 NGO에서 일하기로 결심했죠. 탈북자 인권단체부터 이주노동자 인권단체에 이르기까지 넓고 다양한 NGO들에서 이주민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고용자가 임금을 주지않고, 임금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한국에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민법이 없으니 이주노동자가 된 여러 사연을 들으면서 이 분들께 정말 필요한 건 바로 법적 지원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 최초로 피난처라는 단체가 바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었기에 나머지 NGO들을 접고 피난처에서 3년 간 일했어요. 간사로도 일하고, 난민제도 구축을 위해 많이 노력했죠. 90년대 말~2000년대 초였던 그 때만 해도 법무부는 ‘외국인’이라고 하면 미국,유럽에서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주노동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고등학생으로서 어린나이에 법무부 공무원들과 충돌도 있었어요.

당시 일하면서 느낀 한계는 난민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난민인정자와 신청자 간에 큰 차이, Gap이 있다는 점과 입국과 동시에 국민의 혜택을 누리는 탈북자와 외국인 간에 법적인 차별이 심각하다는 것이었어요. 이런 고민을 해소하기 위한 교육의 기회를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에 외국 유학을 결심했고, 런던에 있는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개발학과 사회인류학을 공부했어요. 학비를 보태기 위해 학교매점에서 일하다가 Student Union과 친해지고 Student Action for Refugees의 동아리 대표가 되서 관련 컨퍼런스에도 나가고 BBC에서 탈북자 관련 다큐멘터리를 위해 통역업무도 하며 무사히 학교를 마쳤죠. 그리고 대학 시절 말레이시아에 있는UNHCR(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에서 인턴을 했었는데, 그때 RSD(Refugee Status Determination) Unit에서 일하며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Standard Operating Procedure에 대한 제안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막상 학교를 끝내고 보니 난민을 도울 수 있는 실용적인 도구가 없어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할까? 고민도 했지만 대신 세계최초로 난민학을 시작한 옥스포드의 Refugee Studies Center로 진학해서 열심히 국제인권법, 난민법, 인도주의법 등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나서 전 다시 UNHCR로 돌아갔어요. 그 이유는 제 열정이 난민지위인정(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권리를 누릴 수 없기 때문에)에 있는데 난민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은 각 정부들에게만 있어요. 또한 정부를 제외하고는 UNHCR만이 유일하게 RSD에 대한 mandate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제 열정을 쏟을 수 있겠다 싶더라구요.

지금 저는 UNHCR에 소속되어서 본부 소속 125개국의 전 세계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RSD 운영에 문제가 있는 나라에 가서 운영시스템을 조직하고, 관련 직원들을 트레이닝하는 업무를 맡고 있답니다. 그리고 RSD 판정 (first instance, appeal, re-opening, cancellation) 도 하죠. 결코 쉽지는 않지만  제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니 너무 좋죠.

2. 국제기구에 진출할 생각을 하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

자신이 어떻게 특정 문제에 기여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가장 첫 번째인 것 같아요. 너무나도 많은 주제와 이슈가 있는데 일단 일을 시작하고 나면그곳에서는 고민할 시간이 없고 전쟁과 같기 때문에 내가 세부화된 나만의 전문분야가 반드시 있어야 해요.

막연하게 국제학, 국제법도 좋지만 너무 broad하게 공부하는 건 추천하지 않아요. ‘내가 너무 특정화된 공부만 하는 게 아닐까?’ 라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아무리 세부화해도 그 안에 또 수많은 이슈가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부터 내가 이 사회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할까? 라는 질문을 내가 잘 하는 것(능력)과 하고싶은 것(흥미)와 잘 조합을 해서 찾아가는 고민을 하는 것이 맞아요. 관련있는 활동(relevant experience)를 한국, 외국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세요.

**그리고 당부하고 싶은 건 ‘나는 UN에서 일 할거야’라며 대기업 취업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하이힐을 신고 멋지게 출근하는 환상과 달리 현장에서 뛰는 건 굉장히 힘들고 안정성이 없는 직업이에요. 내 전문성과 업적을 냉정하게 평가받고 살아남기가 힘든 곳이에요. 그러니 막연한 환상은 버리시고 UN이 아니더라도 다른 정부나 NGO에서 원하는 분야를 찾는 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3. Q&A

1. UNHCR 한국 지부에 인턴을 지원할까 고민 중이에요. 혹시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UN이라는 곳은 엄청나게 많은 세부 기구들이 있어요. 각 기구, 부서, 지부마다 운영방식,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죠. 그 점을 유념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각 지부마다 포커스를 맞추는 이슈도 다르니까요.

2.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자격증이 없어서 제한을 느낀 적은 없으세요?  -전혀 없어요! 변호사증이 있다고 특별 대우를 받진 않아요. 무엇도다도 중요한 건 relevant experience관련 경험이죠. 물론 ICRC 같은 곳에 가려면 많은 수가 Geneva Academy를 나온 사람들이니 이것 또한 단체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딜가든 실용적인 자기만의 도구가 있어야 해요.

3. 국제기구의 어려움?  -국제기구는 Creative한 마인드가 부족할 수 있어요. 큰 꿈을 가지고 진출한다해도 단체 내부의 관료주의적인 면이 강해서 이를 바꾸는 것이 힘들어요. 정부운영에서 답답한 면과 비슷하죠. 그 단체들 내에서도 생각하는 관점과 환경을 바꾸어야 하는데 딱딱한 프로세스가 굳어져 있고 열정을 가지고 온 사람이 드문거 같아요.

그리고 중요한 또 다른 점은 ‘나는 너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으니 내가 도와줄게’ 란 식의 시각은 정말 버려야해요. 난민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는 게 국제사회 내에서부터 필요하죠. 케이스라고 부르긴 하지만 저에게 모든 케이스는 다 ‘사람’이에요. NGO에서 일할 때만큼 그분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긴 힘들지만 좋은 소식을 들으면 그 행복감은 돈과 명예와 바꿀 수 없는 것 같아요.

4. 외국어를 다양하게 구사해야 하나요?  -통역관을 쓰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어요. 그러나 본부에서는 프랑스어를 많이 쓰고 제 경험상으로는 프랑스어, 아랍어를 하면 현지에서 굉장히 유용해요. 오히려 스페인어, 중국어보다두요.

5. 이라크에서의 경험  -예전 후세인과 동맹을 맺고 이웃 이란을 적대시하던 테러리스트 그룹이 있어요. 후세인 정권 몰락 후 새 정권이 이란과 동맹을 맺으며 이들 또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테러리스트 그룹을 보호해주라는 명령이 있었어요. 이들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어서 안전하지 않았고 그래서 미리 안보 트레이닝을 받았었어요.

6. 국제기구에서도 특별히 더 주류층이 있나요?  -네 있죠. 국제기구의 특성상 인종과 성별을 다양화하려는 노력은 있지만 그래도 정치적인 영향력이 커요. 서유럽, 동아프리카, 미국인들이 거의 메인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 쪽 인재들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에요. 그래도 어떤 경우엔 한국 국적을 가진게 Neutral 중립적이어서 좋은 경우도 있어요.

7. 여자이기 때문에 국제기구에서 한계를 느낀 적은 없으세요?  -있어요. 한국 사회보다는 승진이 쉽지만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은 있는 것 같아요. UN내에 공무원 레벨에서도 P1~4까지는 여성의 비율도 높지만 정말 높은 지위는 백인남자가 많아요. 결국 Funding지원이 어느 나라에서 나오냐에 따라 주요지위를 차지하는 게 달라지죠. 

 

4. 마지막 마무리

마지막 질문으로 김종철 변호사가 점심은 무엇을 드시고 싶으시냐고 물어봤더니 심은아 씨는 자기는 간장만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다며 현장근무의 위엄(?)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전문성을 지니시고 당찬 용기로 가득한 모험담을 들려주신 심은아 씨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몸조리 잘하시고 앞으로도 난민들을 위해 힘써주시길 응원합니다!

(6.5기 인턴 이예정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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