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필 3주년 콘서트 후기 2 (토크)

2014년 7월 17일

어필 3주년 기념, 홍순관과 함께하는 어필ing 토크 콘서트 <우리도 어디서는 이방인이다>의 2부는 광주 대학교 교수이며 콩고 출신의 난민인 토나 욤비(토)씨와 어필의 김종철 변호사(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래를 해주신 홍순관님(홍)께서 멋진 사회를 보셨습니다.    

  * 여기를 클릭하시면 토크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종철 변호사님이 일하는 곳이 공익변호사 단체인 공익법센터 어필인데, 공익변호사가 뭐죠? 변호사님은 이 단체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거죠? 투잡을 뛰는 것은 아니구요?

  네. 이 일만 상근으로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필은 APIL를 한국말로 발음한 것인데, 어필의 A는 advocates를 뜻하는 거거든요. 저희가 이름을 지을 때 변호사를 의미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advocates을 선택한 이유는 advocate이 “대신 말해주다. 옆에서 말해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 저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법률 전문성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공익변호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하게 된거에요? 

여기 옆에 계신 욤비 교수님 덕분이라고할 수 있는데요. 제가 변호사가 되기 전에 피난처라는 난민 NGO에서자원봉사를 했었어요. 그 때는 그냥 막연하게 좋은 변호사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일을 하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생각은 없었던 때였죠. 그런데 당시 욤비 교수님은 콩고에서 박해를 피해 한국에 와서 난민을 신청한 상태였는데,  욤비 교수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난민으로서의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에 매료가 되었어요. 저는 평생을 겁장이로 지루하게 살아왔는데, 너무 용감하고 흥미진진한 인생을 살아왔던 거에요.  

근데 욤비 교수님만 그런게 아니라 제가 만났던 난민분들은 다 한결같이드라마틱한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내가변호사로서 이 분들의 이야기에 참여해서 그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해피엔딩으로 가도록 하면 좋겠다라구요. 그래서그 떄부터 난민 변호사가 된거에요. 물론 어필에서 본격적으로 풀타임으로 일한 것은 3년 전이구요.  

  그런데 욤비교수님, 두분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된거에요? 그것 보다 어떻게 한국에 오시게 된거에요?

저는 콩고에서 한국으로 망명 왔어요. 2002년 9월에 왔지요. 그리고 바로 법무부에서 난민 신청을 했어요. 그렇게 신청을 했는데, 6년 동안 기다려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요. 법무부 단계에서 두 번의 심사를 받았어요. 첫 번째 신청이 안되서 다시 이의제기를 했어요. 그런데도 안됐어요. 안 되고 나서 5일 만에 법무부는 5일을 줄 테니 준비해서 나가라고 했어요. 그 당시 저는 공장에서 일했었어요. 새벽에 일하다가 기계가 고장 났었어요. 제가 혼자 수리하려고 하다가 이 팔이 기계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스톱 버튼을 잘 못 눌렀던 거에요. 우르룩 빡! 팔이 낀 거에요. 저 혼자 새벽 3시에요. 전화기가 옆에 있어서 사장님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때 한국말 진짜 몰랐어요. “사장님 빨리 빨리 와 빨리 빨리 와”라고 했어요. 사장님은 “야 지금 새벽 3시야 내일 아침에 해”라고 하며 전화 껐어요. 제가 사장님 친구에게도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사장님 친구가 사장님한테 전화했는지, 사장님이 다시 나한테 전화를 해서 “야 왜 내 친구한테 전화했어 내일 아침에 해” 근데 그 공장 옆에 집 없었어요. 

김종철 변호사 그 때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제가 김종철 변호사 전화번호가 있었기 때문에 전화했어요. 플리즈 마이 프렌드 빨리 와 새벽 3시에요. 그리고 김종철 변호사가 6시 반, 7시 즈음에 왔어요. 그리고 같이 병원에 갔어요. 근데 그때 김종철 변호사가 마음 아파했었어요. “미스터 욤비 공장 일 그만해 우리 집에 같이 가요”. 그때 아마 2005년 아니면 2006년이었는데요. 제가 2002년 왔잖아요? 한국 사람들 길 가면 버스 타면 지하철 타면 차별이 많아요. 근데 이 친구가 자기 집에 가자고 하는 거에요. 저는 그 집에 가면 부인하고 애들이 다 한국 사람일 텐데, 내 피부 때문에 거기서도 차별을 당할까봐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집에 가보니 반대였어요. 김종철 변호사 부인이 프랑스 말로 오 “미스터 욤비 오셨어요. 와 우리 집에 오셨어요”라고 하는 거에요. 제가 놀랐어요. 한번도 차별 안했었어요. 이거 긴 이야기거든요. 근데 이렇게 짧게 말할께요.   

  아까 김변호사님이 이렇게 일하게 된것이 욤비교수님 때문이 아니라 욤비씨 덕분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 때 욤비교수님을 만난 것 떄문에 일이 변호사 인생이 꼬인거 아닌가요?

  저는 욤비씨 덕분에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생각을 해요. 처음에는 난민들이 좀 더 나은 이야기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작 돌아보면 더나은 이야기를 살게 된 것은 제가 아닌가 싶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욤비씨 덕분에 변호사로서의 인생이풀렸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토나교수님도 어필 덕을 본 것이 있나요? 처음 김종철 변호사님을 만난 게 몇 살 때에요?

    제가 그때가 서른 여섯 살이었어요. 소송을 해야 하는데 변호사가 있어야 했어요.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문제가 생겨 법원으로 가게 되면, 한국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죄송하지만 안됩니다”라는 말만 듣게 되요. 난민들도 진짜 변호사 없으면 법원에서 난민 인정을 받기가 힘들어요. 근데 법무부가 저에게 “5일 줄테니. 미스터 욤비 준비해 나가세요”라고 했잖아요. 저는 돈이 없었어요. 한국에서 돈 있으면 그냥 변호사 고용하면되요. 그런데 근데 돈 없으니 어떡해요. 그때 김종철 변호사 “미스터 욤비 걱정마세요 제가 도울게요”라고 했어요. 그때에 제가 김종철 변호사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친구 나처럼 키가 작네. 이 친구가 법원에 가면 아마 키가 작아서 힘들지 않을까”. 근데 거기 가서 진짜 머리가 진짜 똑똑했었어요. 제가 진짜 놀랐어요. 내 케이스가 진짜 답이 안나오는 어려운 거였어요. 지금 나이가 조금 들었는데, 그 때에는 김종철 변호사가 서른 몇 살로 나이도 어렸어요. 그리고 또 키도 작았잖아요. 근데 내 케이스가 법원에서 진짜 너무 빨리 해결 됐어요. 법원에서 땅땅땅 이 사람이 난민이에요 그런 거에요. 오 이 친구가 키는 작은데 머리는 괜찮아요. 김종철 변호사는 이렇게 저를 많이 도왔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난민을 지원하는 것 뿐 아니라 구금되어 있는외국인들, 무국적자들, 인신매매 피해자들도 돕고 있는 것같은데요. 한국인은 안 돕습니까? 왜 외국인만 돕는거죠?

 네 저희가 3년 전 어필을 시작하면서 우리사회의 가장 약자가 누구일까 그 사람을 돕자라고 했는데, 인종차별적이고 어떻게보면 인종주의적인 그런 사회에서 외국인들 특히 강제로 이주한 외국인들과 돌아갈 수 없는 외국인들이 가장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 중에서 난민이나 인신매매 피해자, 무국적자, 구금된 이주자와 같은 더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촛점을 맞추어 일을 한 것입니다.

아까 우리 사회가 외국인 차별적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헌법에 보면 인권에 관한 조항들이 있는데 사람은 무슨 권리를갖는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국민은무슨 권리를 갖는다라고 되어 있어요. 저는 학교 다닐떄 그거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일을 해보면서 이게 너무 이상한거구나. 너무 후진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기본적인 인권을 규정을 하면서 국민만이 그 주체로 규정한다는 것이 말이안되는 거죠. 우리가 헌법을 만들면서 참고한 외국의 헌법이나 국제법 같은 거를 보면 당연히 인간은 무슨권리를 갖는다고 되어 있어요. 가장 기본이 되는 헌법이 이렇게 규정이 되어 있으니 그 하위에 있는 법과제도와 관행도 역시 외국인 차별적이죠. 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국 사람을 구금할 때에는 여러 가지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있죠. 그런데 외국 사람이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구금을 당하면 법원의개입이 없이도 무기한 구금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요. 이러한 예들은 제가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

 욤비교수님은 난민으로서,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제도적인 면에서 차별을 실감할 텐데요. 어떠세요? 

 

 첫번째는 난민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을 많이 겪어요. 사람들은 “난민들 은 위험한 사람들이야. 난민들은 가난 사람들이야”라고 생각해요. 난민들에 대한 않좋은 이야기를 많이해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아프리카 사람이기 때문에 차별을 당해요. “아프리카 사람들 학교 못갔던 사람들, 아프리카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 아프리카 사람들 우리나라에 돈 때문에, 밥 때문에 왔어” 이런 말을 많이 들어요. 

세 번째 차별은 피부색 때문에 생겨요. 전철에 앉아 있으면 옆에 사람들이 안와요. 어디 가서 악수를 하면 악수 후에 사람들이 손을 옷에다 닦아요. 제가 한국에서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불편한 게 많아요. 길에다니면 사람들이 “오 이거 뭐야 오 씨 야야야야 봐봐봐봐 이야 새까매”이런 식으로 수군대요. 그런데 다른 나라가면 이런 일이 없어요.

 욤비토나 교수님은 아이들도 한국에 왔어요? 아이들이 한국에서 자라면서 인종적인 차별을 당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은 안되세요?

 제가 2002년 혼자 왔었어요 같이 가족 못 나왔어요. 위험했기 때문에. 6년 동안 혼자 살았어요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난민 인터뷰 하느랴 고생 많이 했었어요.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2008년 난민 인정이 나왔어. 2008년 2월에요. 그리고 6월에 가족을 데리고 왔어요. 제가 방콕에 가서 거기서 만났어요. 방콕 공항에서 우리 애기 엄마 보고 이렇게 얼싸 안았어요. 그런데 애들은 “엄마 엄마 이 사람이 누구야”라고 물어보는 거에요. 아빠 몰랐기 때문에요. 그 때 한국에 와서 지금 같이 살고 있어요. 

지금 괜찮아요. 왜냐면 우리 애들 한국말 한국사람, 한국 사람들 같아요

저하고 제 아내만 아직 한국말 힘들어해요. 그런데 우리 애들은 한국사람들 같아요 문제 없어요. 또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계속 친구들 집에 왔다 갔다 왔다 갔다하면서 놀아요.   

   외국인과 난민에 대한 심각한 차별을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죠?

 외국인을 차별하는 법과 제도 관행 바꾸는 것 중요해요. 그 동안 어필이 해온 일이 그거에요. 그런데 일을 하면 할 수록법과 제도는 시민의 인식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시민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법과제도가 바뀐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이행하지 않게 되죠. 그래서 저는 환대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생각을 했어요. 저는 오랫 동안 난민법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아왔었어요. 그런데 막상 난민법이 통과가 되었지만 난민 보호와 관련해서는 별로 바뀐 것이 없다는 거에요. 오히려 난민법이 통과된 후에 반다문화 단체로 부터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왜 그런 잠재적인 범죄자를 위해서 일을하냐고요. 

  환대하고 했는데 어떤 사회가 환대인 거에요?

 어떤 사람은 환대를 “다른땅에 왔을 때 적으로 대우 받지 않을 이방인의 권리”라고 정의한 사람이 있어요. 칸트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요. 환대를 최소한으로 본 거죠. 우리는 이것 부터가 안되는 거 같아요. 이방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로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죠. 근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환대에 관한 정의는 “다른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고 거기서 번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냥 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수준이나 겨우 숨이나 쉴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번성하도록 하는 것이 환대인거죠.

 그럼 환대의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도 어디선가 이방인이다>라는 이번 콘서트 주제가 그것을고민하다가 나온 거에요. 우리가 어떻게 환대의 사회로 갈 수 있을까?저는 우리도 가까운 과거에 이방인이었다라는 역지사지가 필요한거 같아요. 과거에 한국 전쟁때문에 또 일제 강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방인으로 살았잖아요? 그렇기 떄문에 우리도 어딘선가 이방인이라는깨달음이 필요한거죠. 또 하나는 우리가 환대의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곳이 너무 살기가 편한곳이어서는 안되는 거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병리적인 것을 못보는 것이고, 그 말은 그것 때문에 배제되고 차별당하는 그룹들을 못본다는 거잖아요. 그런의미에서 우리는 늘 우리 사회와 이질감을 느끼는 지점이 항상있어야 하고 그 말은 다시 우리도 어디선가 이방인이라는 깨달음과 다시 연결이 되는 거죠.

 정말 우리 모두는 어디에선가 이방인이에요. 그래서 외국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어야 하며 이방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세계에 혼자 사는 나라 없어요. 제 친구들은 북한에도 이고, 중국에도 있고 시리아에도 있어요. 이방인들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욤비토나 교수님의 계획은 어떠세요?

저는 대학에서 지금 인권학, 이주난민,  NGO, 인종에 대해 가르쳐요. 지금 하는 일이 아주 좋아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저는 꼭 우리 첫 번째 나라 가야 돼요. 한국은 내 두 번째 나라에요. 첫 번째 나라 콩고에요 꼭 가야 돼요. 한국에서 많이 배웠어요. 준비 많이 했어요. 내 생각은 앞으로 우리 나라가면 한국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어요. 차별 말고 좋은 거, 예를 들어서 경제나 사회복지나 그런거요. 한국 모델을 알려주고 싶어요. 

 지난 3년 동안 어필이 취약한 외국인들을 위해 활동을 해오셨는데 앞으로 계획은 어떤가요?

 장기적으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요. 더 재미있게 일을 하자.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떻게 정의를 통한 평화에이를 수 있는지 고민을 하면서 일 하자. 라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입니다. 그런데 단기적으로는 아주 구체적인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올해 변호사 한 명을 더 채용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사람에 비해 할 일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재정적인 여건만 된다면 꼭 변호사 한 명이 올해 더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김종철 변호사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