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판례]난민신청자의 생계비 동결결정을 취소한 영국판례(Case No: CO/8523/2013)

2014년 5월 8일

“지금까지 돌봐왔던 가족을 더 이상 부양할 수 없다는 건 굉장한 스트레스에요. 아주 끔찍한 시간을 보냈죠. 음식을 먹으려면, 가진 돈을 다 음식에 써야 해요. 약속에 가려면 (돈이 없어) 걸어서 가야 하죠. 장난감도 사줄 수 없고, 무슨 활동도 할 수 없어요. 아이들의 음식을 사 주는 것도 벅찹니다.”

(Vianney, 시에라리온 출신의 난민신청자, 세 아이의 아버지)

어느 나라의 상황이냐구요? 지구 반대편 영국의 난민 신청자들의 상황입니다. 영국 내무부(Home Office)는 지난 2011년부터 난민신청자 생계지원금을 동결해 왔고, 때문에 많은 난민신청자들이 생계의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조금 달라질 것 같습니다.   

England and Wales High Court (Administrative Court) Decisions Refugee Action v Secretary of State for the Home Department(Case No: CO/8523/2013)   

난 4월 9일, 영국 고등법원에서 난민신청자 지원과 관련한 의미있는 판결이 있었습니다. 재판부가 내무부의 2013/2014연도 난민신청자 생계지원금 동결 결정에 대해 ‘내무부의 동결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판결하고 적합한 수준의 생계지원율 조정이 이루어지도록 재결정 명령을 내린 것인데요. 소를 제기한 Refugee Action을 비롯한 영국 내 시민단체들은 이 판결로써 23,000명에 달하는 영국 내 난민신청자들이 생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의미 있는 판결, 김윤진 인턴이 5월 8일 어필 밥터디에서 요약한 내용으로 전해드립니다. (Refugee Action이 발표한 판결문 요약은 여기, 판결문 전문은 여기를 클릭!)   

사진: Refugee Action이 진행하는 캠페인 ‘Bring Back Dignity’

판결의 배경: 영국의 난민신청자 지원 제도

이번 판결은 영국의 난민신청자 지원 항목 중 ‘필수적 재화 및 서비스(essential living 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한 주급을 얼마나 지급할 것인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영국의 현행 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영국의 난민신청자 지원 제도

영국의 난민신청자들은 일반적으로 취업 및 대부분의 사회보장 혜택(소득 지원, 장애 혜택, 사회기금 지원 등)으로부터 배제됩니다. 난민신청 이후 12개월이 경과된 후에야 근로 허가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영국에서는 ‘이주난민법(the Immigration and Asylum Act 1999)’을 두어 ‘궁핍한destitute’ 난민 신청자 및 그 부양자녀에게 2000년부터 난민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내무부 장관은 이들에게 ‘적절한 주거’와 함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재화 및 서비스(essential living needs)’를 제공할 법적 의무를 지닙니다. (이 때 ‘궁핍하다’는 것은 이주난민법상 ‘적절한 주거’와 ‘필수적 재화 및 서비스’를 누릴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사실상 대부분의 난민신청자가 이에 해당합니다.)

기준을 충족한 난민신청자들은 정부가 공적 비용을 지불하는 거주 공간을 배정받게 되고, 생활에 필수적인 의료, 교육 서비스 등을 제공받으며, 이 밖에도 음식, 의복 등의 기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주급(weekly cash payments)’을 받게 됩니다. 오늘 재판의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이 ‘주급’을 동결한다는 영국 내무부의 결정이었습니다.

2) 영국 내무부의 생계지원 제공 현황

영국 내무부는 2011년 4월부터 난민 지원 생계비를 동결해 왔습니다.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하면 실질지원금은 2007년부터 감소해 왔는데요.

본래 난민 지원 수준은 영국민을 대상으로 한 소득 지원(Income Support) 제도를 참고하여, 소득 지원 수준과 연계되어 결정되었습니다. 제도 도입 당시 난민지원액은 성인은 소득 지원액의 70%, 아동은 100% 수준으로 결정되었는데, 2008년부터 이 연계가 끊기면서 소득지원 대비 지급비율은 아래 표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카테고리   주급    소득지원 대비 지급비율    비고 
 독신 성인 (25세 이상*)  £42.62  51%  2008년 이후 미적용
 독신 성인 (18-24세*)  £36.62  64%  2008년 이후 독신 성인 전체에 적용 /소득 지원 구분상 소비액 적은 계층
 Qualifying Couple  £72.52  64%  
 편부모  £43.94  49%  
 16-17세  £39.80**  61%  
 16세 이하  £52.96  81%  

*25세 이상 독신 성인 카테고리는 2008년 이후 삭제. 현재 난민신청자 중 모든 독신 성인은 소득지원 카테고리 기준 18-24세에 해당하는 주급 수령. 소득 지원 카테고리상 18-24세는 지원액이 적은 계층으로, 결과적으로 독신 성인 난민신청자 전체에 대한 지원액이 감소하는 결과 야기.

**내무부는 16-17세 청소년에 대한 주급이 16세 이하와 비교해 급격히 낮아지는 것과 관련해, 이들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이에 따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한 필요들(잦은 의복 교환, 의무교육 등)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설명.

***임산부, 영유아 등은 별도로 추가지원을 받으나, 액수는 2003년부터 변동 없음.

결과적으로, 독신성인을 기준으로 난민 신청자들은 하루에 £5.23(한화 약 9000원 상당)의 지원금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013년 1월 기준으로 영국 빅맥 가격이 £2.69(세트는 £4.29)였음을 고려하면, 빅맥 세트 하나 사 먹으면 2000원 정도 남는 금액으로 하루를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Refugee Action의 조사에 따르면, 난민신청자 중 43%는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른다’, 88%는 ‘옷을 살 돈이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Refugee Action의 제소

영국의 난민재정착 지원단체 Refugee Action은 내무부와의 협의가 결실을 맺지 못하자, 2013년 7월 난민 지원금을 인상하지 않은 내무부 결정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사유를 들어 사법 심사(judicial review)를 제기했습니다.   

1. EU Reception Directive 상의 최소 지원기준(Minimum standard) 제공 의무 위반

2. Equality Act 2010 상의 공적 영역 평등 의무*(Public Sector Equality Duties, PSED) 위반

3. the Borders, Citizenship and Immigration Act 2009 상의 아동보호 및 복지 증진 유념 의무** 위반   

*공적 기관이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반드시 나이, 장애, 젠더, 임신 여부, 인종, 종교, 성, 성적지향 등을 근거로 차별받지 않도록 고려하도록 하는 의무

**내무부 장관이 이주, 난민, 국적 정책과 관련해 영국 내 아동의 복지와 관련된 사항을 보호(safeguard)하고 지원(promote)하도록 하는 의무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첫 번째 사항입니다. EU Reception Directive는 회원국이 난민신청자에게 최소한의 기준(minimum standards)를 충분히(suffice) 제공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Refugee Action은 내무부 장관의 동결 결정은 최소한의 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EU법/국내법 하의 의무 위반일 뿐 아니라, 충분한 조사 없이 관련 사실을 누락하거나 잘못 판단하는 등 많은 오류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내무부는 지원금액은 충분하여 최소 지원기준에 모자란다고 할 수 없고, 지난 5년간 난민지원금도 임금상승률과 동일하게 11.5% 상승했다고 반박했습니다.

판결 내용

Popplewell 판사는 내무부의 2013/2014연도 난민 지원금 동결 결정을 무효화하고 재판부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적절한 수준으로 재결정할 것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가 고려한 주요 쟁점은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1) 무엇이 필수적인가? (What are the essential living needs for which she is obliged to provide support under section 95?)

(2)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인가? (What amounts are sufficient to meet those needs?)

 

재판부는 첫 번째 쟁점과 관련해, 최소 지원기준(Minimum standards) 제공은 장관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EU Directive 상에 규정된 객관적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판시하였고, 두 번째 쟁점과 관련해서는 내무부 장관은 충분성 여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충분한 조사를 수행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내무부가 동결 결정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잘못을 범했음을 판시하며, 결정은 무효이며 아래 잘못을 수정해 적절한 난민 지원을 제공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1. 필수항목 누락

필수 가정용품(세탁세제, 청소용품, 살균제 등), 기저귀 및 조제 분유 등 산모 및 영유아 물품, 일반 의약품, 개인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활동에의 최소한의 참여할 수 있는 기회 등 주급 산정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을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2. 특정항목 미고려

법률 조력인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이동 비용, 가족 및 변호인과의 연락 및 난민 주장을 위해 필수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전화 통화 비용 등이 필수적인지 여부가 아예 고려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3. 필수적 재화 및 서비스(essential living needs) 계산 과정의 오류

내무부는 판단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잘못된 자료 활용, 조사 불충분, 자료 무시 등 오류를 범했다.

a) 2007년부터 현금 지원 수준이 실제로는 절대 가치상(in absolute terms) 11% 감소했는데도 불구하고, 되려 11% 증가한 것으로 계산

b) 물가 상승 압력으로 인해 지난 몇 년간 실질 가치가 하락했다는 사실미고려

c) 동결 결정에 근거로 사용한 통계청 데이터 오독

d) 합리적 결정을 위한 충분한 자료 수집 미이행

e) (16-17세 청소년들에 대한 주급이 적은 것과 관련해) 16-17세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 대한 지원금이 줄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하며, 16-17세 청소년들이 full-time 의무 교육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의무교육 대상자가 아니라는 잘못된 근거를 들어 지원액을 적게 지급한 것은 이들에 대한 의무를 부적절하게 이행한 것임

  

출처: Refugee Action

시민 사회의 반응

영국 시민 사회는 재판부의 이번 결정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소를 제기했던 Refugee Action은 ‘매우 감동적인 판결’이라며 내무부가 이 획기적인 판결에 근거해 투명하고 탄탄한 조사를 수행하여 영국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이 겪는 가난이 이제 해결되길 희망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향후 내무부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내무부가 관련 단체와 협력하여 건설적인 대안을 만들어내길 바란다는 입장도 피력했습니다.

나가며

저는 개인적으로 판결문을 읽으며, 세탁세제나 아기 기저귀 등 세세한 품목들의 필수성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난민신청자의 삶을 밀접하게 고민한 흔적을 통해 영국 사회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데 가지고 있는 합의의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판결은 취약한 난민신청자들을 위해 가장 가까이에서 일한 시민단체의 끊임없는 노력과, 당사자의 입장을 매우 구체적으로 고려하여 실제 필요를 검토한 법원의 역할, 그리고 난민신청자들이 마땅히 제공받을 권리를 구체적 항목으로 명시한 EU 및 영국의 법체계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요? 난민법은 법무부장관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난민신청자에게 생계비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사항을 EU 및 국내법에 명시하고 있는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생계비를 지원하는 기준이나 규정이 모호하고 예산 확보가 부족해,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난민신청자가 많은 실정입니다.

본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한국에 찾아온 난민신청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도 취약할 수 밖에 없는데요. 이제는 우리 사회를 찾아온 이방인들이 인간적인 삶을 꾸릴 수 있도록, 이들을 맞이하는 의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지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GDP 순위 15위(영국은 6위)인 한국의 경제적 위상과 영국의 1/10 수준인 난민신청자 수를 고려할 때,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7기 인턴 김윤진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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