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드어필3 후기]내 이름은 욤비, 용기있는 난민

2013년 1월 30일

지난 1월 25일, 이번으로 세 번째이자 2013년도 첫 번째 살롱드어필이 문을 열었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셔서 행사는 대강당으로!

제 3회 살롱드어필은 ‘내 이름은 욤비’의 저자이자 콩고민주공화국(DRC) 출신 난민 욤비 토나씨를 초청해 욤비씨가 콩고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난민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콩고는 원주민어와 프랑스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욤비씨가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콩글리시(콩고-잉글리시)를 사용하겠다고 하셔서 웃음이 터진 행사장. 욤비씨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프랑스어와 영어 동시능력자(!)인 권송 어필인턴이 통역을 맡아주셨습니다.

 
살롱드어필의 시작은 어필의 김종철 변호사님의 간단한 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짧은 인트로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욤비씨가 자신이 난민 변호사로 살게 된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는 말입니다. 난민이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해주었다는 욤비씨. 욤비씨의 책과 이야기 속에는 정말로 용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선택이 가득했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콩고하면 아프리카의 국가를 떠올리지만 콩고가 두 곳이라는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콩고공화국(RC)과 콩고민주공화국(DRC)이 있으며 욤비씨는 그 중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난민입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국토를 갖고 있는 나라로 여전히 작은 왕국들이 자치령처럼 남아있습니다. 
왕의 외동아들인 아버지와 왕의 외동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욤비씨는 자칭 ‘더블 킹’이라고 합니다. 
 
욤비씨의 아버지는 콩고가 아직 벨기에의 식민지배 아래에 있을 당시 강제적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은 의사였다고 합니다. 욤비씨가 살던 지역에는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하나뿐이었고, 아버지는 욤비씨의 미래를 크게 걱정해 13살이었던 욤비씨를 카톨릭계열 기숙학교로 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공부할 마음을 잃을걸 걱정해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욤비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장 수도 킨샤사에 있는 대학교로 갔습니다.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에는 콩고 비밀정보국의 정보요원이 되었습니다.
 
 
난민이 되어 한국으로
콩고의 비밀정보국에서 정보요원으로 일하게 된 욤비씨는 정권비리를 알게 되고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투옥 당한 이후 고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정보국에서 6명이 잡혀 들어가 4명이 탈출했고, 그 중 한 명이 친구의 도움으로 탈출한 욤비씨였습니다. 3명은 유럽으로, 욤비씨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욤비씨는 왜 한국으로 왔냐는 질문을 언제나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오게 된 건 선택이 아니라, 그게 쉬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욤비씨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콩고를 가까스로 탈출해 중국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콩고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다가 난민으로써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기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베이징의 대사관거리에서 눈에 띈 한국 대사관을 보고 우여곡절 끝에 인천항으로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콩고하면 한 나라만 떠올리는 것처럼, 아프리카에서도 한국하면 다들 북한을 떠올립니다. 욤비씨는 이태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평양이 정말 크다고 생각을 했다가 금세 택시기사의 지적으로 자신이 남한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해서 며칠 후, 욤비씨는 UNHCR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UNHCR 지부가 없었고 일본에 있는 지부가 한국의 업무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엔의 도움으로 욤비씨는 난민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콩고에서 난민신청을 하면 난민들이 지낼 수 있는 피난처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민국과의 인터뷰 첫 날 콩고처럼 난민을 위한 피난소에서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욤비씨에게, 인터뷰를 마친 출입국 직원은 잘 가라는 인사만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프리카인이나 난민에게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구하면 불법체류자가 되니 일을 하지말라는 당부도 함께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욤비씨는 인터뷰에 동행한 일행의 도움으로 잠시 머무를 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살 곳은 생겼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난민 신청기간동안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했습니다. 평생동안 육체노동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욤비씨가 한국에서 공장을 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욕을 듣고 맞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욤비씨가 한 공장에서 야간업무를 하고 있을 때, 팔이 기계에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겪었다고 합니다. 새벽 3시경에 혼자 수습을 할 수가 없자 욤비씨는 공장의 사장에게 연락을 해 빨리 와달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일 아침에 해’라는 것 뿐, 친구를 통해서 다시 연락을 해보아도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욤비씨는 당시 사법연수생이던 김종철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집이 공장과 먼 곳이었지만 김종철은 단걸음에 달려와주었고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욤비씨는 공장에 대해 얘기하려면 일주일은 계속 할 정도로 많다며 웃었습니다. 
 
 
 
 
한국에서 난민이 되기까지 6년
가장 중요한 건 난민신청이었습니다. 욤비씨가 난민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6년 동안, 욤비씨는 20차례 이상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욤비씨는 영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통역을 도와주는 분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대신 한국어를 조금밖에 몰라 불한사전을 봐가며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욤비씨에게는 이 인터뷰가 생명이 달린 문제였기에, 불안한 통역의 도움을 받기보다 직접 영어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도록 영어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곧 통역 없이 직접 인터뷰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문제가 커지고 말았는데, 한 인터뷰에서 욤비씨는 ‘언제 졸업(graduate)했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벨기에)어의 graduate이 college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때를 대답했는데, 후에 “when did you finish your study?”라는 질문에 모든 공부를 마친 시점을 대답하자, 면접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을 내려치며 거짓말쟁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면접관의 생각에는 두 질문에 대한 답이 같아야 하는데, graduate을 졸업한 연도와 모든 공부를 마친 연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낀 욤비씨는 인터뷰가 끝나고 UNHCR에 사정을 알아보길 부탁했습니다. 의사소통 문제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 면접관은 욤비씨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인터뷰에서 만날 때마다 오늘은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말을 하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욤비씨의 난민신청은 거부되었습니다. 이의신청을 할 때에는 난민 NGO인 피난처에서 직접 콩고를 방문해 증거를 수집하였고, 이 증거를 제출했지만, 법무부는 이것도 거짓말이라며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한 번 쌓인 불신때문이었습니다.
 
욤비씨는 한국에서는 인터뷰를 할 때 전문적인 통역가를 지원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로 인해 많은 실수나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불인정 이후에는 법원에 가야했습니다. 욤비씨는 한국은 변호사가 너무 비싸고 자신은 돈이 없었기때문에 많이 걱정을 했지만, 감사히도, 김종철이 변호사가 되어 있었고, 다른 NGO와 변호사 친구들과 함께 팀을 꾸려 욤비씨의 사건을 담당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욤비씨는 3개월만에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지 6년만이었습니다.
   
열린 감옥에서 사는  것
난민으로서 산다는 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욤비씨가 하는 말 입니다.
실제로 욤비씨는 난민인정을 받은 후 변한 것은 난민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 한장 뿐이라고 합니다. 난민인정을 받으면 일할 권리를 받지만 노동시장에 나가면 한국인을 위한 일이라며 일을 주지 않습니다. 
 
욤비씨는 한국인들은 자국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고 말합니다. 1950년대에 수 많은 한국인들이 난민으로써 해외로 건너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길거리에 나가서 난민에 대해 물어보면 한국에도 난민이 있냐는 대답, 왜 한국같은 작은 나라에 오냐는 대답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욤비씨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해서
욤비씨는 두가지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국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시아 내의 난민들을 도우는 것입니다. 
욤비씨는 지금도 매주 콩고 사람들이 청취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있으며 콩코밖에서 콩고를 바꾸기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욤비씨는 한국에서 518이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배웠으며, 아프리카가 한국을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물론 난민을 거부하는 모델이아니라 국가를 세우는 모델을 배우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습니다.
욤비씨는 지난 8월부터 Asia Pacific Refugee Network (APRRN)의 adviser라는 요직을 맡고 있는데, 난민을 돕고 싶다면 난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난민으로서, 또 다른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역할을 잘 담당하고 싶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어필의 미녀 변호+ 인턴분과 사진도 ~^*^~

   욤비씨의 이야기가 끝나고, ‘내 이름은 욤비’의 저자 사인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살롱드어필에서 특별히 ‘내 이름은 욤비’ 책을 30% 할인 된 가격으로! 저자의 사인도 함께! 구할 수 있었습니다. 줄이 너무 길어서 저도 행사가 끝나고 한참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길게 후기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후기는 욤비씨가 살롱드어필에서 해주신 이야기의 빙산의 일부였다는 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욤비씨의 이야기, 용기있는 난민의 이야기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내 이름을 욤비’를 꼭 읽어보시길! 이번 이야기를 들으셨던 분이라도 다시 한 번 책으로 욤비씨와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욤비씨의 말씀대로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콩고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기 인턴 이재윤)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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