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나은이야기1회] 당신과 내가 우리로

2013년 5월 27일

1. 난민이라는 말, 어떤 것이 먼저 생각나세요? 

첫번째 더 나은 이야기를 시작하며 김종철 변호사가 던진 질문입니다. 질문이 시사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 그것은 아직도 한국에서 타인 중 타인으로 살아가는 난민과 우리 사이의 거리감이었습니다. ‘우리’속 ‘그들’로 살아가는 난민은 아직도 많은 이에게 생소하며, 환영받지 못하며, 고정관념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 현실을 마주하여 이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다는 행위의 의미가 무엇이 될지 고민 반, 기대 반이 되는 오프닝이었습니다.   

2. 더나은이야기는 일단 세 순서로 구성되었습니다. 첫번째로는 이날의 스토리텔러, 김 변호사님을 난민변호의 길로 이끈 장본인 중 하나인 토나 욤비 씨였고, 두번째로는 서울 유엔난민기구에서 오신 스텔라 오군라데 법무관, 그리고 세번째로는 청중이 주인공이 되어 해결방안을 논하는 take action 시간이었습니다. 이날의 주인공인 욤비 씨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로, 그리고 머지않아 더 놀라운 실력의 한국어로 직접 청중과 소통하셨는데요, 맛깔스러운 입담에 표정,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그 굴곡있는 인생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군라데 법무관은 욤비 씨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그 개인사만큼이나 굴곡있고 복잡한 콩고 내전의 역사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질문들로 이어진 청중의 큰 호응 가운데 시간의 제약으로 세번째 take action 시간은 (안타깝게도 ㅠㅠ) 생략되었습니다. 

3. 이 날 대두되었던 약 세 가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볼까 합니다.

첫째로는 뭐니뭐니해도 욤비 씨의 ‘더 나은’ 인생 이야기었습니다. 처음 서울에 도착해 물인줄 알고 소주를 들이켜고 앓은 후 콩고 정부에서 보낸 독살시도인줄 의심했던 오해, 이후 한국에서 “집없이 밥없이” 살았던 6년, ‘새끼야’라고 불리며 콩고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육체 노가다를 한국서 하게 된 이야기, 직물공장에서 밤늦게 일하다 팔이 기계에 낀 사고. 사람냄새로 뭉근한 모험담에 매료되어 40분 내지의 짧은 시간이었으나 욤비 씨와 함께 웃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는 콩고의 광물 이야기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욤비 씨의 인생사와 그것의 배경이 되는 콩고 내전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콩고의 분쟁광물인데, “3TG”로 불리는 이 광물들 (gold, tin, tantalum, tungsten)을 둘러싼 분쟁은 지금까지 700만명 콩고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합니다. 놀라운 점은 우리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이 700만명의 죽음을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무장단체들로부터 헐값에 콩고 광물을 사들이는 다국적 기업, 그리고 이 기업들의 도덕성 여부엔 무심한 채 최신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사들이던 우리가 바로 이 분쟁 광물의 수요자이자 수혜자이기 때문이죠. 욤비 씨의 표현을 따르자면 700만명 콩고인들의 피가 우리 손에도 묻어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올랐던 문제는 콩고와 주변국 역사를 둘러싼 우리의 이해 (혹은 오해) 였습니다. 욤비 씨는 호텔 르완다 등의 매체에서 (현재 콩고 분쟁의 근간이 되는) 후투/투치족 간의 갈등이 매우 편파적으로 포착되어 있다는 강한 비판을 했고, 오군라데 법무관 역시 후투 = 가해자, 투치 = 피해자로만 보는 이분법적 해석은 매우 큰 역사적 왜곡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화두는 서방국가에 (그리고 우리에게) 팽배한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 및 후투/투치 분쟁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이었기에 청중으로부터 특히 많은 질문과 관심을 받았습니다. 역사적 진위 논쟁을 떠나 이들의 대화에서 분명히 드러난 점은 후투/투치 갈등은 아직 아물거나 매듭지어지지 않은 과거이며, 그 아픔은 여러곳에서 (특히 콩고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지속/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국 현대사를 생각해볼때 과거는 깔끔히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사실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경우 너무 쉽고간단하고 편리하게 그 과거를 규명해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난민, 아프리카, 그리고 넓게는 타인과 이방인에게 가지고 있던 얕은 이해를 생각해볼때, 한국 사람은 일본 빼고는 역사를 다 잊은 것 아니냐는 욤비 씨의 마지막 질문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10년에서 45년 사이 역사의 상흔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면서도 1950년대부터의 역사, 전쟁을 겪으며 난민 신분으로 세계 각지로 떠났던 한국인의 역사, 김대중 전대통령 또한 한때 난민으로 한국을 떠났던 그 역사. 과연 그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냐는 청중을 향한, 크게는 한국인을 향한 질문에 과연 우리는 우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자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난민을 이해하는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4. ‘우리’의 이야기 

욤비 씨는 난민인정을 받은 후의 삶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외국인등록증이 있고 의료보험이 있을 뿐,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난민은 타인으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날 우리가 들은 한 난민의 이야기는 단순한 ‘남 얘기’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욤비 씨의 소주 후 속쓰림에서, 콩고의 광물에서, 동아프리카를 피로 물들이는 후투/투치간 분쟁의 아픔에서 투영된 것은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단란하고 소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그것은 ‘당신’과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5기 인턴 김인애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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