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필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파티

2012년 12월 27일

두 분의 에티오피아 난민이 전해준 기쁜 소식

얼마 전 어필이 도와주었던 에티오피아 출신 M씨가 2년만에 난민인정을 받으셨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난민인정을 받으신 P씨가 어필에 연락을 해서 귀화를 받으셨다는 기쁜 소식을 또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에티오피아 분들을 축하하기 위해 2012년 크리스마스 저녁에 어필의 김종철 변호사의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커피, 가뭄, 마라톤선수…정도인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에티오피아 아저씨들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에티오피아에 대한 다른 조각들이 드러나 더 멋진 그림이 그려지네요.

커피 맛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

에티오피아에는 과연 세계 최고의 커피들-하라, 이르가체페, 시다모, 짐마-이 있다고 하는데요. 에티오피아사람들은 커피 향만 맡아도 이게 어떤 커피인지 종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검은 물이면 다 커피인줄 안다고 P씨가 심각한 얼굴로 한마디 하시는데 모두들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사실이 그렇거든요…그리고 에티오피아는 자원이 풍부해서 커피 외에도 목화, 금 등등 여러 가지 자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티오피아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독재정권이 유지되고 있어, 군대가 커피를 콘트롤하여, 군대를 통하지 않고는 커피를 수출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커피 냄새는 비록 구분은 못하지만 M씨, P씨가 왜 에티오피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냄새가 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독재정권의 악취

M씨는 에티오피아 경찰로 17년간 일을 했습니다. 반듯한 제복과 군기 있는 말투가 멋있다는 생각에 경찰이 되었지만 막상 경찰이 된 후에는 에티오피아에서의 경찰의 삶이 멋지지만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현 에디오피아 여당인 EPRDF는 에티오피아력 1997년(에티오피아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지 않고 1년이 13개월로 이루어진 고유의 달력을 사용하는데, 그레고리력과는 약 7년 정도가 늦다) 총선에서 패배하자 이를 무효라고 선언하고 야당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경찰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193명의 시민이 살해되었으며 부상자도 739명에 이르렀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경찰은 시위대에 총을 발사하여 그 중 160명을 사살한 것입니다. 

M씨에게도 시민들에게 발포하고 시위 참가자들을 구금, 고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시위대에게 공감하고 있던 M씨는 이에 복종하지 않고 총을 발사하지 않았으며, M씨가 지지하던 야당의 회원들이 수배된 경우 미리 그 사실을 알려 도망칠 수 있도록 하였고, 수감된 경우에는 몰래 금지된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당국이 야당과 시위대에 대해 가혹한 행위를 할 때에는 저항하여 반대입장을 드러냈습니다. 선거 후 수 많은 시민들이 임의로 구금되었으며 이들은 가족이나 언론, 시민단체들 몰래 밤에 후송되었습니다. M씨는 경찰로서 이들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잡혀간 사람들이 어디로 옮겨졌고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가족이나 언론에 보내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삼청교육대

M씨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경찰들에게 M씨가 야당 회원이라는 의심을 품게 하였고,  결국 M씨는 정신 교육한다는 이름 하에 500명의 경찰들과 함께 블라테 군기지(Blate Army Center)로 호송, 감금이 되었습니다. 블라테 기지에서 M씨는 뜨거운 모래 위에 장시간 앉아 있는 등의 고문과 폭행, 굶주림, 그리고 중노동의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체제에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세뇌 교육을 받았습니다. 조사관들은 함께 갇혀 있던 수감자들을 격리하여 서로를 밀고하고 정보를 털어놓도록 하였지만 M씨는 야당 회원이라는 것이 들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백을 하지 않았고 결국 석방되어 경찰로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석방 이후 6년간 M씨는 계속 상부의 감시를 받으면서, 힘든 업무들만 배정되었으며, 승진도 할 수 없었지만, 신념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참전했던 한국에서 피난처를 찾은 아들

그러던 중 M씨는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기독 경찰 컨퍼런스에 초대되었는데, M씨의 아버지가 60여년전 한국전에 참전했었기 때문에 기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쉽게 외국으로 탈출할 기회가 없었던 M씨는 한국에 와서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고, 2년만에 난민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M씨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왕의 특별부대(special force)였는데, 일반 군대보다도 더 정예의 군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라고 합니다. P씨의 말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이탈리아군과 5년간 싸웠던 경험이 있는데, 에티오피아 왕은 이 경험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에서 한국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최고의 부대를 한국으로 파병했다고 합니다.

M씨는 당시 너무 어려서인지 아버지로부터 한국의 이야기를 많이 듣지는 못했나 봅니다. M씨가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는 당시 결혼하고 이미 아이가 둘이 있었다는 것, 한국이 너무 추워서 총보다도 껴입은 옷이 더 무거웠다는 것, 왼쪽 눈에 부상을 입은 것은 전투 중 폭탄 연기 때문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60년만에 아버지가 찾았던 나라를 매우 다른 이유로 찾게 된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60년 전, 이 나라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들이 과연 한국에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늦게나마 한국이 아들을 난민으로 보호해 줌으로써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최소한의 체면을 차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변호사 정신영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

관련 활동분야

난민 관련 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