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시일반…소말리아 소년 Y를 향한 따뜻한 이야기

2012년 9월 18일

사무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Y와의 인연

2012년 7월 5일, 공익법센터 어필의 1주년 기념행사를 준비에 여념이 없던 오후에 출입국사무소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힘겹게 영어로 한마디씩 전하는 한 남성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전쟁과 부족간의 갈등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소말리아에서 ‘평화로운 곳’을 찾아 한국으로 날아온 15세 소년 Y었습니다.

 

소말리아에서의 생활

Y는 소말리아 국적의 모가디슈(Mogadishu)출신으로, 소수민족인 Goboye족에 속해 있으며 현재 만 15세(1997년 4월생)의 미성년자입니다. Y의 아버지는 2008년 운영하던 가게에 폭탄이 날라 와서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전쟁을 피하여 도망을 한 후 실종되어, 그는 고아로 길거리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왔습니다. 하루에 20 켤레 정도 닦아서 하루에 1.5달러를 벌었는데, 구두닦이로 돈을 벌면 음식을 사먹고, 남는 돈으로 구두닦이에 필요한 용품을 샀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많은 경우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빼앗기곤 하였습니다. 일정한 거처도 없어 거리와 폐가가 그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난 늘 죽음의 그날 아래에서 살았어요.” Y가 인터뷰 중에 한 말입니다. Y는 소말리아에서의 지속되는 구조적인 차별(소말리아의 소수민족인 Goboye족은 노예 출신 성분으로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과 무력 분쟁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5개월 전 그의 삼촌이 땅 분쟁문제로 죽임을 당한 후에 그의 두려움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때 Y의 고객이었던 아흐메드(Ahmed)라는 자가 평화로운 곳으로 데리고 가주겠다고 하여 그를 따라 모가디슈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Terminal’…공항에서의 악몽 같았던 4주의 시간

비행기에서 내린 후, 의자에 앉아 있으면 데리러 온다던 아흐메드는 돌아오지 않았고 Y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홀로 남아 두려움에 떨었던 Y는 2012. 7. 3. 공항 직원 등에게 발견되었고, 난민인정신청의 의사표시를 하였으나, 여권 미소지로 출국대기실(입국불허자 대기실)로 이송이 됩니다. Y는 현재 만 15세의 아동임에도 불구하고 위 대기실에 장기간 갇혀서 거의 매끼를 치킨 버거로 때우고, 대기실 의자에서 잠을 자며 2012년 7월 30일까지 약 4주를 보냈습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장기간의 여정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극심한 복통과 치통 그리고 심장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였고, 정신적으로 심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강제송환의 위기와 극적인 입국승인

Y가 공항 출국대기실에서 강제송환이 이루어질 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필이 Y를 대리하여 난민신청을 하려고 했지만, 출입국사무소와 공항에서 문전박대 당하여 헛걸음을 수차례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필은 Y를 위해서 인신보호법을 근거로 구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법원에 청구를 하기도 하였고, 난민신청 접수 거부의 위법·부당함을 다투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린 소말리아 난민을 향한 UNHCR과 공익법센터 어필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Y는 2012년 7월 30일 결국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입국 후에는 사단법인 피난처의 도움으로 Y는 쉘터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Y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Y가 소말리아를 떠날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따뜻한 손길이 그를 감싸고 있습니다. 공익법센터 어필은 Y를 위해 난민신청을 대리하고 있고, 사단법인 피난처는 숙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불면증과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불안증세를 보이는 Y에게 문지현 선생님은 정신과치료 및 상담을 무료로 해주셨습니다. 또한 서울대 병원의 권용진 선생님이 소개해준 적십자병원의 희망진료센터에서도 CT촬영 및 각종 검사를 거의 무료로 해주었으며, 피난처의 인턴인 이정현님을 비롯한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아랍어 통역을 지원해주고 한글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서서히 Y의 얼굴에서 희미하지만, 미소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Y에게 또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공익법센터 어필의 아래층에 위치한 ‘연세이앤오 치과’에서 무료로 치과진료를 해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어필 식구가 Y의 치아가 흔들린다는 것이 생각나서 오경춘 의사 선생님께 Y에 대해 소개하고 저렴하게 치료를 해주실 수 있느냐고 부탁을 드렸는데, 오경춘 선생님은 흔쾌히 무료로 해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Y는 소말리아에서 구두닦이를 통해 번 돈과 물건을 힘이 센 다른 부족에게 강탈당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얼굴을 가격당하여 앞니가 흔들리고 잇몸이 크게 상하여 치과치료가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치과 진료 후 Y는 우리를 향해 더 밝은 미소를 짓겠지요?

 

그런데, 최근 Y는 저녁이 되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근시성 난시’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직 심한 단계는 아니지만 공부를 할 때 활자가 흐릿하게 보이는 등 조그만 했던 불편이 점점 크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안경을 원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금새 자신의 상황을 알고는 괜찮은 듯 미소를 짓는 Y. 앳되고 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 뒤에,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조숙함에 마음이 아픕니다.

 

이러한 Y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부스러기 사랑 나눔회’와 룩앤룩 안경원에서는 ‘LOOK&LOOK 안경나눔사업’의 대상자로 Y를 선정하였습니다. 렌즈 너머로 이 소년이 더욱더 맑은 세상을 바라보고, 고통과 암흑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Y를 보며 느끼는 난민의 열악한 인권상황

최근 한국을 찾은 난민 전문가인 바바라 해럴본드는 난민들을 가로막는 물리적 장벽으로 인해 이들은 밀입국 브로커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구조화된 문제를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이들이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본국으로 송환 될 경우에 ‘배신자’ 취급을 면하기 어렵고, 실제로 캐나다에서 난민인정을 거부당하여 본국으로 송환된 지 한 달 만에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Y역시 소리조차 내보지 못하고,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수많은 난민들의 선례를 따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입국허가를 통해 Y가 한숨 돌리게 되었다고 느끼실 수 있겠습니다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난민 인정 비율이 낮은 대한민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얼마가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Y는 교육이 시급한 15세 소년이라는 점도 Y에게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며 이 역시 순탄치는 않은 상황입니다.

15세 소년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문제들이 아직도 도처에 있지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민간차원에서 다각도로 지원을 해온 것과 대조적으로, 정부차원의 지원은 전무(全無)한 상황입니다. 정부가 입국허가를 해주었다는 것으로, Y에 대해서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난민신청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 않는다면 법적으로(de jure) 강제송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실상(de facto) 강제송환이라고 할 것입니다.

 

Y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Y와 처음 만났던 날,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맛있는 식사가 하고 싶다’거나 혹은 ‘그간 쉬지 못하였으니 휴식을 취하고 싶다’와 같은 대답을 기대했던 저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뜻밖에도 ‘공부’가 가장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Y는 지금까지 Abdilahibin Kabas 라는 사립학교를 1년 다닌 것 말고는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힘이 센 부족이 그가 다니는 학교를 폐쇄하고 무너뜨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소말리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 내전과 부족간의 분쟁으로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한 상황입니다. 심지어 미성년자를 유괴ㆍ납치하여 군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여유조차 없이, 단지 하루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게 부족간의 분쟁으로 학교가 무너져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Y는 지금도 허름한 여건 아래서 언어와 물리를 배울 수 있었던 그 당시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틈틈이 하는 한글공부가 재미있기만 합니다. 아직은 자신의 이름 정도를 쓰는 수준이지만, 지하철 역명과 간판을 열심히 따라 읽으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서 배움에 대한 그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5살 소년 Y.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면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정규교육과정을 단지 1년 밖에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보내야 할지, 중학교에 보내야 할지, 아니면 특성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지, 공익법센터 어필은 Y의 난민신청 대리와 별개로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Y가 그에게 적합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방안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Y를 향한 여러분의 지혜를 모아주시고, 함께 동행해 주세요! Y가 그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있어 교육이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3.5기 인턴 성무현)

영화 ‘터미널’ 재연…‘출입국 미아’ 운명은?  2012년 8월 23일 KBS 뉴스 http://news.kbs.co.kr/society/2012/08/23/2523506.htm

인천공항, 한국으로 넘어온 외국인을… 충격, 2012년 9월 18일 한국일보 기사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2300898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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