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하기 좋은 세상을 넘어 – 글로벌 사우스와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구속력 있는 조약

2019년 7월 30일

정신영 변호사는 2019년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기업의 영향력과 면책특권을 해체하고 민중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글로벌 캠페인(Global Campaign to Reclaim Peoples Sovereignty, Dismantle Corporate Power and Stop Impunity)’에서 주최한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구속력 있는 조약에 관한 아시아지역 T/F (Asian Task Force for Binding Treaty)’ 모임과 국제공공노련(Public Service International)에서 주최한 정의로운 무역을 위한 노조 (Unions for Trade Justice) 모임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기업과 인권에 관한 자발적인 규범인 UNGP가 2011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각국에서 이를 이행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도입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이보다 더 강력한, 실제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건너건너 들어왔던 바라, 실제로 아시아 지역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와 구속력 있는 조약 
 
이번 T/F 회의를 주최한 (이름이 너무나도 긴) ‘기업의 영향력과 면책특권을 해체하고 민중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글로벌 캠페인’ (줄여서 글로벌캠페인 으로 표기합니다)은 다국적기업의 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은 커뮤니티와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사회, 환경단체, 노조, 선주민, 농민 모임 등 전세계에서 250개 이상의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캠페인입니다. 주로 글로벌 사우스 (Global South)라고 일컬어지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지역의 중저소득 국가의 단체에서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으며, 실제로 유엔에서도 글로벌 사우스의 정부에서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구속력 있는 조약에 대한 논의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글로벌 캠페인의 홈페이지 –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구속력 있는 조약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다양한 논의에 대해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2014년 6월에 열린 인권이사회에서는 남아공과 에콰도르의 주도로 구속력 있는 국제규범을 통한 다국적 기업 활동 규제를 위한 규범이 마련되도록 개방형 정부간 실무그룹(Open-Ended Intergovernmental Working Group)을 설치하는 결의 (A/HRC/RES/26/9)가 채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2015년부터 2019년 7월까지 총 4회의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첫 두 회의에서는 조약의 내용, 범위와 형식에 대한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반면, 3차 회의에서는 조항(element)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2018년 10월 4차 회의를 앞두고 조약 초안(Zero Draft)이 발표되었으며, 2019년 7월 16일에는 초안의 개정판(revised zero draft)이 공개 되었습니다.

구속력 있는 조약과 관련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쟁점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이슈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초국적기업 vs. 모든 기업 
 
2014년 6월에 채택된 의결 (Resolution 26/9)의 주석에는 구속력 있는 조약이 초국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는 기업에 대해서만 적용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이 되어 있는데, 이를 둘러싸고 조약의 적용 범위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석이 등장한 배경에는 한 국가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경우 국내법으로 기업들을 규제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보통 초국적기업들은 국내법으로도 규제가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고, 한 국가 내에서만 활동하는 기업을 포함한 모든 기업에 대해서도 적용이 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개정된 Zero draft에는 조약이 주로 초국적 성격을 띄는 행위에 적용이 되지만 이에 국한 되지는 않는 것으로 범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Article 3. Scope 1. This (Legally Binding Instrument) shall apply, except as stated otherwise, to all business activities, including particularly but not limited to those of a transnational character. 
 
2) 기업의 직접 의무(direct obligation) vs. 간접 의무 
 
기존의 유엔에서 만들어진 모든 조약은 국가가 의무 이행 주체이기 때문에 기업과 같은 제3자가 인권 침해를 야기하는 경우에도 국가가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하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국적기업이 국가보다 더 큰 영향력과 권력을 행사하며 인권 침해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다국적기업이 직접 인권 존중 의무를 갖고 이행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로 ILO 협약에서 비준은 국가가 하지만 사안에 따라 고용주에게 책임을 지우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ILO협약 176호 7조의 경우, 고용주에게 통제 하에 있는 광산에서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위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경감시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있는데, 이를 기업에게 직접 책임을 부과한 것으로 보고, 구속력 있는 조약에서도 이와 같이 기업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문자로서 조약에 넣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 이행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가 책임의 주체가 되고 기업은 간접적으로만 책임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초국적기업의 인권 침해 사안에 대해 국가를 초월해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국제 재판소를 만들면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개정된 Zero draft의 제6조 법적 책임 (Article 6. Legal Liability)에 따르면 조약을 이행할 의무는 여전히 국가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3) 중대한 인권 침해 vs. 모든 인권 침해 
 
UNGP 채택을 주도한 존 러기를 비롯하여 OHCHR이 주도하는 책임과 구제 이니셔티브와 서방 국가들은 기업이 중대한 인권침해 (gross violation)를 범하는 경우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도록 해야하며, 주로 국제법 상의 범죄에 대해서 형사 제재를 부과하는 형식으로 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사우스에서는 주로 기업에 의한 인권 침해는 노동, 산업 안전, 음식, 토지, 환경 등의 영역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사안들은 국제법 상의 범죄로 규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업의 모든 형태의 인권침해에 대해 민사, 형사, 행정적 제제를 다양하게 부과하도록 조약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개정된 Zero draft에서는 ‘모든 인권’에 대해서 적용이 된다고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Article 3. Scope 3. This (Legally Binding Instrument) shall cover all human rights. 
 

4) UNGP와의 보완성 
 
사실 구속력있는 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근거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미 UNGP가 있는데 왜 또 새로운 규범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이에 만약 새로운 조약을 만든다고 해도 이미 UNGP가 널리 수용되고 있기 때문에 UNGP에서 논의되었던 국가의 의무, 기업의 책임, 구제책으로의 접근과 같은 세가지 기둥이라는 프레임워크가 그대로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UNGP 를 바탕으로 더 진보적인 내용의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과 UNGP와는 무관하게 별도의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개정된 zero draft는 UNGP의 기업의 자발적 준수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서, 기업의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형태의 ‘계약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인권침해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게 하고, 피해자가 구제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Article 1. Definition 4. “Contractual relationship” refers to any relationship between natural or legal persons to conduct business activities,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those activities conducted through affiliates, subsidiaries, agents, suppliers, any business partnership or association, joint venture, beneficial proprietorship, or any other structure or contractual relationship as provided under the domestic law of the State. 
 

기업과 인권에 관한 개방형 정부간 실무그룹의 홈페이지 – 구속력있는 문서에 관한 논의 진행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엔 홈페이지 답지 않게) 가독성도 높고 자료도 찾기 쉽게 해놨습니다.  

 
 
 
인권이 아닌 투자자 보호를 위한 무역 협정 
 
이와 함께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에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습니다. 한 예로 RCEP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은 한·중·일 3개국과 아세안 10개국,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중심으로 역내 무역과 서비스, 투자 자유화 실현을 목표로 하는 메가 FTA (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입니다. RCEP은 기존의 자유무역협정과 마찬가지로 협상과정 대부분이 비밀리에 진행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ISDS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ISDS 조항을 활용하여 초국적기업들은 투자유치국의 규제 혹은 정책 변경으로 인해 경제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판단할 경우, 국제 민간 중재 기구에 투자유치국을 회부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다국적기업들이 국가의 공공 정책에 대해 개입하고, 공공 부문에 사용되어야 하는 세금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프랑스의 폐기물 처리 업체인 베올리아(Veolia)는 이집트의 최저임금 인상으로 손해를 봤다며 이집트 정부에 배상금 1.7억 유로를 청구하였고, 스웨덴  전력회사 바텐폴(Vattenfall)은 후쿠시마 참사 이후 탈원전을 결정한 독일 정부에 배상금 47억 유로를 청구하는 국제 중재를 제기를 한 바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 정부도 론스타가 외환은행 투자 회수 과정에서 정부가 부당 개입, 부당 과세를 하였다며 5조원 이상의 금액을 청구 당하여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민의 세금으로 고액의 변호사 비용을 포함한 중재 비용이 지출되고 있는 상황이며, 그 외에도 하노칼, 다야니, 엘리엇, 쉰들러 등 다양한 다국적기업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청구한 금액이 6조 6천억원에 이릅니다. 
 
▲ 대부분 글로벌 사우스의 노조활동가들인 참가자들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 시그니처 팔동작의 높이와 각잡힘 정도에 따라 국가와 경륜을 가늠할 수 있다는 건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기업하기 좋은 세상을 넘어,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으로 
 
이렇듯 투자자는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를 본 금액에 대해 중재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 반면, 투자자는 인권 침해를 야기했다고 한들 어디에서도 책임을 질 의무가 없습니다. 가령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선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한 다국적기업이나 수출자유지역에서 노조파괴를 일삼는 다국적기업들은 진출국(host state)에서는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적절하게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본국(home state)에서는 법적으로 이들을 책임지게 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며, 결국 피해자들은 어디에서도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는 구속력 있는 조약에 대해 거는 기대가 상당합니다. 이들이 반복적으로 제기했던 의문은 도대체 왜 투자자는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할 수 있는데 투자자는 어디에서도 책임을 지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다국적기업에게 면책 특권(immunity)이 주어진 것과 같은 상황이며 이러한 면책 특권을 해체하기 위해서 구속력 있는 조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사실 구속력 있는 조약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에 들었을 때에는 한국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이에 대해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었습니다. 자발성을 전제로 하는 UNGP로는 실질적으로 기업이 인권 침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피해자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게 하기가 너무나도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한 과정을 통해 조약을 만든다고 한들, 조약이 비준되고 또 이행되는 것을 감시하는 것 또한 쉽지 않기 때문에, 과연 실현 가능한 일인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간 기업에게 ISDS라는 특권까지 마련되며 전 세계가 ‘기업하기 좋은 세상’이 되어가는 동안 피해를 입게 된 많은 글로벌 사우스의 선주민과 노동자들의 절박함을 현장에서 접하며, 구속력 있는 조약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고있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을 다시 그려나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나라에 살더라도 삶의 터전을 빼앗기지 않고, 환경 파괴와 유해 물질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구속력 있는 조약이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가진 글로벌 사우스의 친구들의 캠페인을 지지하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에 여념이 없어서인지, 구속력 있는 조약에 대한 논의(resolution 26/9)에 반대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한국 정부에게도 구속력 있는 조약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것으로 연대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영 변호사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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