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11월] #83. 맛집을 많이 아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 윤보나 학생난민지원팀장

2026년 11월 3일

처음 인사를 드리는 글에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난민과 함께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여러 난민 지원 단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 사이에는 진로를 고민하고, 제 부족함을 확인하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주저했던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함께 밥을 먹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난민 지원 단체를 처음 접하게 해주신 교수님은 제게 따뜻한 밥과 커피를 사주셨습니다. 활동가를 진로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에는 처음 활동했던 단체의 대표님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슬픔과 괴로움에 울부짖는 난민분을 마주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작게 느껴져 무력감에 빠졌을 때에도 선배 활동가분들이 사주신 맛있는 밥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조언을 들었는지보다 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셨다는 기억이 더 선명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 말에도, 행동에도 모순이 많았을 텐데 그분들은 제 고민에 서둘러 결론을 내려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저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꺼내 놓을 수 있었고 고민을 다 해결하지 못한 채 돌아오더라도, 적어도 혼자 감당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제 뒤를 봐주고 있다는 든든함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른들을 만나며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만큼,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일하며 살고 싶은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누군가가 마음속에만 담아두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 때, 함께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맛있는 밥집과 커피가 좋은 곳을 알게 되면 일단 저장해두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 ‘맛집을 많이 아는 어른’을 꿈꾸며, 어디서든 맛집을 발견하면 차곡차곡 저장해두고 있습니다.

그러던 제가 이제 어필에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육경로는 난민 학생들이 안전하게 한국에 와서 대학 교육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는 사업입니다. 어필 크루들이 일본 출장을 다녀와 이 사업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저는 멀리서 “한국에서 저런 일을 하는 분들이 계시는구나” 하고 감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그 일을 맡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난민분들 곁에 더 잘 있고 싶어서 대학원에 들어간 지 한 학기가 지났을 무렵, 어필의 채용 소식을 듣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원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을 직접 해볼 수 있게 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다만 그 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할수록, 기쁜 마음 옆에 질문도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갑작스럽게 다른 나라로 이주했던 경험과 가까운 난민 배경 친구들이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일까요. 제 경험만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만나지 않은 학생들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여건을 뚫고 얻은 교육의 기회가 한국에서의 외로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입국과 입학을 위한 절차를 준비하면서도, 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뒤 보낼 시간이 마음에 걸립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연락할 수 있을지, 아직 서툰 말로도 자기 이야기를 편하게 꺼낼 사람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만날 학생들의 마음을 더 이해하고 싶어 난민의 심리 지원에 관한 강의들을 찾아 듣고 책도 읽어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다 보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어른들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학생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무엇을 어렵게 느끼고 무엇을 좋아할지는 만나서 배워가야 하겠지만 준비한 답부터 꺼내느라 정작 그 사람의 말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저 역시 답을 찾지 못하고 같은 고민을 되풀이하던 때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다시 제 길을 생각할 힘을 얻었으니까요.

“맛집을 많이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학생들이 힘든 날 제게 부담 없이 밥을 청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함께 밥만 먹는 날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날에는 오래 귀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얻어먹은 밥을 생각하면, 앞으로 사야 할 밥이 꽤 많습니다.

최종수정일: 2026.11.04

관련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