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2년 8월] #30. 든든한 마음으로 - 정신영 미국변호사

2022년 8월 4일

저는 지난 6월 인도네시아의 파푸아섬을 방문했습니다. 코로나로 국경이 닫히기 직전 방문하여 만났던 팜유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만나고, 또 그사이 소식을 접한 펄프 목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피해자들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는 길은 분명 같은 길인데 꼬박 3일이 걸려 도착한 마을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섬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화석연료가 아닌 바이오연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고, 이 과정에서 파푸아섬에도 팜유 플랜테이션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어필에서는 파푸아섬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인권 침해와 환경 파괴에 대해 조사를 하고 대응하는 일을 해오고 있는데, 최근 기업에서 팜유 플랜테이션에서 열대림과 이탄지를 파괴하지 않고 지역주민과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겠다는 NDPE선언 (No Deforestation, Pea, Exploitation)을 채택하였고 RSPO(Roundtable on Sustainable Palm Oil, 지속가능한 팜유 생산을 위한 원탁회의)이라고 하는 자발적 인증기구에 가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자발적인 선언과 인증을 통해 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른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분명 다른 마을의 다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2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느 날 숲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확인해봤더니 이미 숲은 사라졌었고, 이후 마을로 찾아온 회사 직원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 깨끗한 물과 보건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하였습니다. NDPE나 RSPO에 대해서는 회사가 부족의 리더들하고만 논의하기 때문에 특히 여성들은 상황을 잘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파푸아에서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숲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역할을 감당해왔습니다. 사구(sagu)를 수확하고, 야생 멧돼지를 비롯한 동물을 사냥하는 일들은 모두 여성의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아주머니 중 한 분은 팔에 난 상처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시면서 야생 멧돼지를 사냥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야생 멧돼지에게 쫓기다가 상처가 났지만 결국엔 나무 위로 올라가서 그 멧돼지 위로 뛰어내려 올라탄 후, 돼지의 목을 베서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다른 아주머니께서는 본인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는 밧줄이라며 밧줄로 야생 멧돼지를 잡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입을 벌리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저와 일행을 보고 마을 아주머니들은 깔깔 웃으시며 이야기꽃을 피우셨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들이 사냥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멧돼지를 비롯한 동물들이 살 수 있는 숲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냥이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파푸아 사람들의 주식인 사구(sagu)가 자라는 곳도 사라져서 먹거리를 책임지는 여성들의 부담이 커졌습니다. 여성들은 식구들의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부족의 다른 숲으로 더 멀리 까지, 사냥과 사구 수확을 하기 위해 여행하거나, 아예 갈 수 있는 숲이 없는 경우에는 회사나 정부의 시혜적인 정책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정부나 회사에서는 정기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주는데 사실 쌀은 파푸아 사람들의 주식(主食)이 아닙니다. 파푸아 사람들은 사구를 먹으면 속이 든든하지만 쌀을 먹으면 기운이 안 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였는데,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논을 없애고는 대신 밀가루를 준다고 하면 과연 누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싶은데, 파푸아 사람들의 숲을 뺏고 쌀을 나눠준다는 것은 이들의 권리 침해를 넘어 모욕적인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은 사구를 수확하러 가는 길에 저와 일행을 데리고 가주셨는데, 벌레와 늪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긴 팔과 긴 바지에 등산화로 무장을 하고 따라나선 저희와 달리 아주머니들은 맨발에 칼 하나를 차고 유유자적이 길을 나섰습니다. 아주머니들은 푹푹 발이 꺼지는 숲에서 조심하느라 발만 보고 다니는 저희에게 이 나무는 머리가 아플 때 먹으면 되는 이파리가 달려 있고, 저 나무의 진액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되고, 이 나무의 줄기를 꼬아서 가방을 만들 수 있고 또 저 나무의 열매는 어떨 때 쓰면 좋다고 숲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한 아주머니는 ‘숲은 우리의 부엌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아주머니께서 비유를 쓰신 것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파푸아 사람들은 숲에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기도 하지만, 숲은 이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책이자 자녀들에게 물려줄 미래이기도 합니다. 파푸아 사람들은 숲의 곳곳마다 역사를 기억하고 가르치기 위한 노래가 깃들어 있다고 하는데 플랜테이션이 개발되면서 숲이 사라지자 조상들을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물려줄 노래도 같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플랜테이션이 밀어버린 것은 나무 몇 그루가 아니라 파푸아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 파푸아 사람들의 삶 전체였던 것입니다.

기업은 플랜테이션으로 밀어버린 만큼의 숲을 어딘가에 조성하는 것으로 보상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지속가능한 팜유를 생산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는 곳에 심어질 보기 좋은 나무들이 과연 마을 사람들이 잃어버린 삶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아주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숲에서 아이들과 3년 동안 사셨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숲이 사라지면 슬픔은 어디서 달래야 하는 것일까 괜히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눈물만 흘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기업에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도 들었고, 또 숲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아주머니의 자녀는 대학에서 마을 사람들의 숲을 지키기 위해 법 공부를 하며 변호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을 입구에 십자가와 함께 ‘마을의 풍요로운 땅은 팜유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팻말이 든든하게 세워져 있던 모습입니다. 숲은 늘 파푸아 사람들의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한 팻말일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든든한 팻말을 세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지구에 마지막 남은 숲을 지켜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든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이들의 정직하고 용감한 싸움에 우리가 빚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기후 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제시되는 수많은 약속 사이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파푸아섬의 마을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의 이야기와 든든하게 마을 입구에 서 있던 팻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또 어필의 소식을 듣는 여러분이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계속해서 이들의 싸움을 함께 응원해주신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최종수정일: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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