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9일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김종철 변호사가 발제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이방인이 우리 땅에 왔을 때 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
“이방인이 우리 땅에 왔을 때 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 이것은 칸트가 <영구 평화론>이라는 책에서 정의한 환대의 개념입니다. 환대에 관한 아주 좁은 정의이지만, 아주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주민과 난민은 우리 사회에서 편견과 차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적대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영국의 브랙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사건을 보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어떻게 이주민과 난민들이 차별과 배제 그리고 적대를 당하고 있는지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놀랄 것도 아닌 것이 한국에서는 그런 식의 차별과 적대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
저는 오늘 크게 두 가지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과 난민이 어떻게 적대hostile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적대는 단순히 태도나 정서의 문제를 넘어서서 법과 제도적인 문제라는 것을 제가 어필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는 어떻게 우리가 환대의 사회로 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관련한 것인데, 왜 우리는 이주민과 난민에 대해 환대를 해야 하고, 이주민과 난민을 환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닥치고 니네 나라로 돌아가“
“다문화 필요 없어. 닥치고 니네 나라로 돌아가. 안 그러면 무사하지 못할 거야.” 제가 초창기에 난민 소송을 대리했던 사람 중에 토나 욤비씨라는 콩고 출신 난민이 있는데, 그 분이 최근에 전화로 이런 협박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한국에 온 지 5년이 지난 후에 소송을 통해 겨우 난민으로 인정을 받는 등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광주대학교에서 교수로 인권을 가르치시고, 아시아태평양난민인권네트워크(APRRN)에서 의장으로 선출이 되는 등 이주와 난민과 관련된 국내외적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 언론과 한국에 다문화 정책과 관련해서 “무늬만 다문화”지 결국 동화정책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비판을 했다가 위와 같은 협박 전화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난민법 검색어 1위
이런 협박을 저도 받은 적이 있는데요. 난민법이 시행되기 직전에 반다문화 단체라는 곳에서 협박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 5년 전만 해도 난민에 관한 이슈는 매년 6월 20일 전후로 하는 난민의 날 행사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13년 난민법이 시행되기 직전에 네이버 검색순위 1위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난민법이 시행되어 난민이 들어오게 되면 한국에 마약이 넘쳐나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외국인 흉악 범죄가 급격히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글이 순식간에 광범위하게 회자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들도 난민=범죄자로 생각하고 저에게 그런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난민지원센터를 둘러싼 해프닝
영종도에 난민지원센터(공식명칭은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를 설립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부는 난민지원센터를 다른 곳에 설립하려다가 그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쳐, 영종도에서는 소문을 내지 않고 몰래 설립한 후에 개소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역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난민지원센터가 들어서면 그 주변이 우범지대가 된다고 반대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대를 하는 주민들은 그 센터 가까운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차를 타고 가야 할 정도로 멀리 사는 사람들입니다. 겨우 주민들을 설득하고 개소를 했는데, 그 센터에 입소한 난민 아동들이 가까운 학교에 다니지를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센터 주변에 있는 학교가 학부모들의 반대 때문에 난민지원센터에 다니는 난민 아동들의 입학을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헌법상 인권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국민
그런데 이러한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적대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고 법적이고 제도적인 것입니다. 우선 헌법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 아시지만 헌법은 한국에서 적용되는 가장 상위의 법입니다. 그런데 헌법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가 인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범주 중에 더 우월한 것은 인권에 관한 조항들입니다. 왜냐하면 통치구조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권에 관한 조항들을 보면 그 주체를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국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권 조항의 내용이 사람이면 마땅히 누릴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권리가 아닌 ‘국민’의 권리로 규정해 놓은 것입니다. 헌법부터 이주민에 대해서 차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법이 이렇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하위법이나 정책 그리고 관행이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출입국관리공무원이나 심지어 법원에서 조차 출입국관리법을 외국인에게 적용되는 거의 유일한 법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 같았으면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법과 제도가 이주민과 난민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서, 이들에 대한 적대가 어떤 수준인지 가늠을 할 수 있습니다. 어필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송환대기실의 난민
난민은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난민으로 인정 된 이후까지 생애주기 전체에 걸쳐서 심각한 적대를 겪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국에 도착한 직후에 어떻게 적대를 당하는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난민들이 한국에 도착해서 입국을 하지 못하면 일반적인 난민인정절차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난민으로 보호를 받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공항 송환대기실에 갇혀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2015년 말에 시리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테러를 피해서 한국에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갔다면 소위 prima facie로 난민인정을 받았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들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보고서 8개월 동안 송환대기실이라는 사실상의 구금시설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거의 고문에 가까운 처우를 받았습니다. 침구도 부적절했고, 환기도 제대로 안 되어 벼룩과 이가 들끓었으며, 식사는 하루 세끼 치킨 버거만 제공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장기구금된 이주민
그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주구금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이주구금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야만적인 제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근대법이 우리에게 준 중요한 혜택 중에 하나는 신체의 자유를 제한할 때에는 자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의적인 구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법부 등 독립적인 기관의 개입이 있어야 하고, 구금의 상한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잘못한 것을 넘어서 구금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의적 구금금지 원칙이 송두리째 지켜지지 않는 영역이 이주구금입니다. 정기적인 사법기관의 판단 없이 행정기관의 명령으로 구금이 시작되고 지속이 되는데, 그러한 구금은 상한이 없어서, 단순한 행정규범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최장 5년까지 구금되는 이주민들이 있습니다. 제 의뢰인 중에서도 거의 4년 가까이 구금된 사람이 있었는데, 국내 절차를 모두 소비하고 유엔인권이사회의 결정을 통해서 겨우 풀려났지만, 그 이후에도 장기 구금으로 정신건강이 악화되어 너무 고생을 했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 너무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이 분이 풀려난 직후에 어필 사무실에 찾아오셨는데,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일어나서 복도로 가신 후에 전화를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4년 동안 사람과 대면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어서 전화로 말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적대적인 이주구금 정책은 어른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주 아동들도 위와 같은 자의적인 구금에 희생자들입니다. 저희는 2년 전부터 월드비전과 함께 이주아동구금근절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www.dap.or.kr로 가셔서 둘러보시고 서명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출생등록이 안되는 이주아동
지금까지 어필이 하고 있는 일을 중심으로 난민과 이주구금에 관한 법과 제도가 얼마나 이주민과 난민에게 적대적인지를 말씀드렸는데, 무국적자와 인신매매에 관해서도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무국적자와 관련해서는 출생등록 문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한국은 보편적인 출생등록제도가 없습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보편적인 출생등록을 하라고 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국제인권기구의 권고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동은 출생을 등록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출생을 등록하는 방법은 가족관계등록을 하는 것인데, 외국 국적의 아동은 여기에 등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외국인 아동이 출생등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국 대사관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외국인이 자국 대사관에 가서 출생등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난민이나 체류자격 없는 이주민의 경우에는 자국 대사관에 접근자체가 안되거나 접근을 한다고 해도 출생등록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출생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법과 정책은 출생등록을 할 수 없는 이주아동들을 계속해서 방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신매매 혹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이주 어선원
마지막으로 인신매매된 이주민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어업과 농축산업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이주민들이 인신매매 혹은 강제노동의 피해자가 될 위험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어필은 지난 2년 동안 한국 어선에서 일하는 이주어선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이주과정 전체에서 이들이 겪는 인권침해는 인신매매 내지 강제노동에 해당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낮고 차별적인 임금을 받으면서 하루 20시간 가까운 노동을 하는 이주민들이 많았고, 욕설 뿐 아니라 신체적인 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주어선원들은 어선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여권을 빼앗겼고, 임금이 체불(유보)된 상태였으며, 고액의 이탈보증금을 송출업체에 지급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으로 감금을 당하기도 했고, 환적transhipment로 1년 이상 육지로 오지 않은 채 바다에만 머물렀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필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적대가 단순히 태도나 정서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정책과 법적인 측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짧게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사회는 환대의 장소가 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앞서 우리는 왜 환대의 사회가 되어야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환대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환대의 이유
왜 이주민과 난민을 환대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가 힘듭니다. 주로 법률가들은 우리가 이주민과 난민을 보호하고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윤리적인 의무가 아니라 국제인권조약 등에 기초한 법적인 의무라는 식의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대답을 가지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대의 이유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멀지 않은 과거에 이주민으로 또는 난민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으므로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주민을 환대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난민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테러를 피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주민과 난민에 대해 환대를 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안보와 경제 때문이라고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주민과 난민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곁에 둠으로 인해서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해 지고 다양성에서 오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대답이든 만족스럽지는 못하고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무슨 환대
그리고 우리가 환대를 이야기 할 때 어떤 뜻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칸트가 정의한 환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난민과 관련해서는 아주 적절한 정의이지만, 환대를 아주 최소한으로 개념화 한 것입니다. 이보다 약간 더 넓은 정의는 ‘크리스틴 폴’이라는 사람의 환대에 관한 정의입니다. 그는 환대를 “우리 그룹이 아닌 멤버에게 우리 안에 공간을 내어주고 거기서 잠시 동안 집(at home)처럼 있도록 하는 것”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환대에 관한 정의는 ‘코넬리우스 플랜팅가’라는 사람이 내린 “우리 안에 머물 공간(자리)을 내어주고 그 안에서 꽃피도록(flourish)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넓은 환대에 대한 정의는 ‘데리다’의 것인데, 그는 “손님과 주인으로서의 위치가 무의미해지는 절대적인 환대”를 주장합니다.
환대는 총체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
환대의 범위가 칸트>크리스틴 폴>코넬리우스 플랜팅가>데리다 로 넓어지는데, 저는 이 환대의 정의가 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난민을 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환대의 최소한인데, 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우리의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난민에게 우리 안에 공간 혹은 자리를 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말했듯이, 공간 혹은 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단지 돌봄(자선) 뿐 아니라 존경(권리)을 주는 것입니다.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공간이 있어야 그 사람이 사람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느 집에 찾아 갔는데 사랑방이나 최소한 앉을 곳을 주지 않고 마당에 서있게 한 채 밥을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경우 그에게 돌봄과 자선은 베푼 것일지 모르지만, 존경과 권리를 주지 않은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난민을 대할 때 그들을 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에게 자선과 돌봄을 베풀어야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머물 수 있는 우리 안의 공간 혹은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 말은 그들에게 존경과 권리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 난민 활동가들이 쉽게 잘못하는 부분이 이런 점입니다. 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선물을 주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행동들을 너무 쉽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김현경은 앞의 책에서 브르디외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선물을 주는 것은 선물을 불러오는 선물의 힘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명예에 대한 평가 절하이며, 이렇게 일방적으로 선물을 받는 사람은 마치 중세시대에 결투를 거부하는 사람처럼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난민들에게 잠시 동안 우리 안에 자리를 내어줄 뿐 아니라 나아가 그들이 그 안에서 꽃 피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는 환대를 정의하면서 flourish라는 말을 일부러 썼을 것입니다. 꽃 피우다, flourish라는 표현이 좋은 것은 여기에는 목적성, 잠재성, 상호의존성, 특히 포괄성의 개념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난민들이 환대를 받는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이 우리와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 이르기 까지 꽃 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대와 해석학적 파트너
그런데 데리다가 말하는 절대적 환대에 대해서는 제가 데리다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지 현장에서 난민을 계속 만나는 법률가의 입장에서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오히려 환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인과 손님의 경계가 아예 없어져서는 안 되는 거 같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손님은 나중에 주인이 되고 주인은 어느 때 손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손님과 주인이 무의미해지게 되면 환대의 개념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주인과 손님이 무의미해지는 절재적인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인과 손님이 상대화 되는 수준 까지는 받아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난민을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고 그들이 그 안에서 꽃 피도록 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우고(그들은 우리로부터 배우고) 서로를 해석학적 파트너로 삼아 상호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환대를 통해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데리다가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해지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 경계가 상당히 흐려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정체성을 뭔가 남과는 다른 것으로만, 정체되어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혈을 강조하고, 유일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과의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끊임없이 형성해 갈 수 밖에 없고, 타인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정체성이 부유하게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주민들을 우리의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선생으로 가장 잘 모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배워 우리의 정체성을 풍성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또 다른 우리(손님)’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다름을 무시하고 그들을 우리로 치환하기 위해 “이방인이 우리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선생으로 모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해지기 때문에 “이방인(손님)은 우리(주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정체성이 없어지지도 이방인의 다름이 무시되지도 않으면서도, 이방인이라는 선생으로 부터 배워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미의 환대를 할 수 있다면, 이방인과 우리는 서로 배우면서 상호 변화하고 그로인해 정체성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환대라는 말인 hospitality가 원래 hopes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hopes는 손님이면 동시에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윤리의 핵심은 환대이고, 특히 그들을 우리의 선생으로 모셔서 서로 배우는 의미에서의 환대여야 합니다.
(김종철 변호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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