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채 방치된 사람들: 2011 대지진 이후의 일본에서 살아가는 난민들
카츠노리 코이케(Katsunori Koike)
<일본 동북(토호쿠) 지방 전도>
재난 대비 정도에 있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들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011 대지진 이후 가장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길 소홀히 하였습니다. 많은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asylum seekers)이 각종 거주 이전(movement)의 자유 규제로 인하여 고통을 겪었고,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견뎌야만 했으며,일본어 역량 부족과 인터넷 접속으로부터의 소외 등의 요인들로 인하여 재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2011년 3월 11일에 일본을 강타한 지진과 해일(tsunami)로 인하여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25만 개 이상의 건물들이 손상되거나 부서졌습니다. 440만 가구가 단전되었고 230만 가구가 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당한 금액의 구호금과 기부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의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은 비교적 적은 도움을 받거나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재난의 결과는 너무도 파괴적이었기에, 또 다른 지진과 지진으로 인하여 손상된 원자력 발전소로부터의 방사능 유출을 염려한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에서 출국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일본 출입국 관리국(Immigration Bureau: IB)엔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줄 ‘재입국 허가(re-entry permit)’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망명 관련 법규 시스템 속에서 출입국 관리국은 난민지위인정신청자들에게 재입국 허가서를 발급해줄 수 없습니다. 비호신청자들은 그에 따라 일본에 남아 있는 것의 즉각적인 위험과 그들이 모국에서 겪을 위험을 저울질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 남은 난민과 비호신청자들의 선택권은 그 여지가 매우 협소했을 뿐만 아니라 조력을 받을 어떠한 전망도 없었습니다. 이상의 현실적 조건들로 인하여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은 재난 상황에 직면하여 다음 3가지 어려움들에 직면하였습니다.
첫 번째, 서류상으로 등재되지 않은 비호신청자들에 대한 거주 이전의 자유 규제들이 위기 상황 속에서 더욱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규제되는 조건으로 거주지를 취득하여 일본에 체류 중이던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은 전대미문의 돌발적 혼돈 속에서 시급히 대피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입국 관리국의 “재난 관련 사항 고려”라는 비공식적이고도 불명확한 코멘트 때문에 이후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지정된 거주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난민이나 비호신청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거주지를 취득했던 비호신청자들도 위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한편, 구금된 비호신청자들은 더욱 강한 억압을 받았습니다. 동일본외국인보호소(the East Japan Immigration Centre)에 구금되어 있었던 일부 피구금자들에게 따르면, 출입국 관리국 직원들이 지진 중에도 구금된 자들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며 ‘걱정 말라’, ‘구금된 자들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엔 상사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피구금자들이 패닉에 빠지자 출입국 관리국은 끝내 잠근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출입국 관리국은 피구금자들이 혼란 중에 구금시설에 끼친 손괴에 대한 피해 보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일본은 지진 피해에 대한 대비가 가장 철저하게 되어 있는 나라들 가운데서도 정점에 있는 나라면서도, 이주민 구금 센터에서의 긴급 탈출 방법 지도 및 훈련 프로그램을 갖추진 못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가뜩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이 대재앙 이후 더욱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이 극단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부적절한 정부 지원, 언어 장벽, 그리고 좋지 못했던 경제 상황으로 인하여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의 삶은 궁핍하기 그지없습니다. 핵발전소가 파괴되어 전력 공급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3시간 동안의 정기 정전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는 터전인 공장들과 식당들이 재난 이전보다 적은 시간 동안만 영업하게 되었습니다. 영업시간이 단축되어 이전보다 적게 일하게 되거나 심지어는 해고를 당하여 직장을 잃게 되는 경우, 이는 즉각적인 수입 감소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용한 후원금들이 재해 현장 복구 관련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와중에 난민 구호 활동을 벌이는 비정부 기구들은 후원금을 확보하는 데에 이전보다도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세 번째,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은 지진과 방사능에 대하여 신용할 만한 정보의 부족을 겪었습니다. 대부분의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이 지진이 드물거나 핵에너지가 아직 보급되지 않은 국가 출신인 까닭에 이들이야말로 지진과 방사능 위험에 대한 정보가 절실합니다. 인터넷 접속, 일본어 능력, 이주민공동체와의 관련성 여부가 정보를 얻는 3가지 핵심 요소들이라 할 수 있는 와중에 난민들은 때때로 모국에서 갈등을 빚었던 인물들이나 조직과 조우할까봐 두려워 오히려 자신들의 이주민공동체와의 교류를 피하곤 합니다. 아울러 인터넷에 접속해도 일본어 역량 없이는 일본 언론들과 일본 정부의 보도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경우, 외신들의 보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재난 당시 외신들은 일본 언론들과 일본 정부의 공식 보도에 비해 더 많은 비중을 방사능 위기감 고조에 할애한 바 있습니다. 외신들의 방사능 위기감 고조에 노출된 와중에, 모국에서도 정부에 의해 박해받은 경험으로 인하여 기본적으로 공권력 전반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의 재난에 대한 공포는 일본 언론들과 일본 정부에 대한 의심으로 인하여 더욱 커졌습니다.
한 쿠르드 족 가족의 사례가 그들이 직면해야만 했던 지독한 딜레마를 잘 보여줍니다. 6명으로 구성된 이 쿠르드 족 가정은 일본에 10년 이상 거주하였고, 두 명의 아이들은 아예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난민지위인정신청은 거절당한 바 있으나, 그들은 일본 법무상(the Minister of Justice)이 인도적 차원에서 그들의 거주를 용인하는 긍정적 결정을 내릴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재난의 상흔과 불확실해진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힘든 결단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영아들은 일반 성인들보다 방사능에 훨씬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어린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아버지만 일본에 남고 어머니와 아이들은 터키로 돌아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직 난민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던 그들은 법적으로는 거주권(residence permit)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었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출국한 어머니는 자연히 서류상으로는 강제추방된 것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어도 출국 이후 5년간은 일본으로 입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한 가정이 일본에 함께 살며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어려움들과 새로이 부상하는 어려움들을 모두 감내하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최소 5년 이상의 세월동안 헤어져 살기를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상시국 속에서 소외되어온 사람들이 더욱 소외되고 취약해졌습니다. 출입국 관리국은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엔 다른 카테고리의 외국인들 관련 업무들을 수행하는 데에 여념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이 겪는 곤란은커녕,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부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들로서의 자신들을 행동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매우 많은 수의 난민들과 비호신청자들이 열성적으로 재난 피해자들을 돕는데 나섰습니다. 예를 들면 일단의 재일본 미얀마 인들이 재빠르게 300명의 실향민들에게 카레를 제공하였습니다. 미얀마 출신 난민 조직들이 미화 6500달러의 가치에 이르는 50만 엔을 모금하여 기부한 와중에 서일본외국인보호소의 피구금자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소액까지 모금하여 지진 피해를 입은 동북 지방으로 보냈습니다. 이들 기부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여전히 정기적으로 피해 현장을 방문하여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쓰나미 피해를 입은 리쿠젠타카타 시(陸前高田市) 잔해 청소를 돕고 있는 우간다 출신 비호신청자들>
한 우간다 출신 난민은 “지금이야말로 제 목숨을 구한 일본에게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귀중한 경험을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의 필요에 대해 응하는 사회, 누구도 외면당하지 않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길 희망합니다.
[원문 링크]http://www.fmreview.org/technology/46-47.pdf
(3기 인턴 강태승 번역 및 요약 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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