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처형되는 의병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위 사진은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의 결과 일본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는 항일의병의 사진입니다.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가장 활발한 곳이 전라남도였는데, 일제는 1909년 9~10월동안 2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 지역의 의병들을 말 그대로 ‘초토화’하였습니다. 의병장만해도 103명이 희생된 이 작전을 계기로 항일의병세력은 만주, 연해주로 건너가 국권이 침탈되어버린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군대, ‘독립군’으로 재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 8월 15일, 오늘은 대한민국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 국권을 회복한지 꼭 69년이 되는 날입니다. 광복 69주년을 맞아 공익법센터 어필은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들과 오늘날 정치적 난민의 유사점에 주목해보았습니다.
1951년 제정된 난민협약에서는 난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써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그러한 사건의 결과로 인하여 종전의 상주국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상주국에 돌아갈 수 없거나,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상주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당시 해외로 망명하여 자주독립을 외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난민협약상의 정의에 부합하는 난민이었을까요? 물론 난민협약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1951년에 제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는 2차 대전 종식과 동시에 종료되었기 때문에 일제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협약상난민이 아니겠죠. 🙂
그렇다 하더라도, 한반도 내에서 독립운동이라는 일종의 정치적 운동을 하는 것에는 일제의 거센 탄압이 뒤따랐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해외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했었던 독립운동가들의 현실은 21세기 현재 자기 부족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해외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소수민족인 방글라데시의 줌머인, 미얀마의 카친족과 어느 정도 닮아있는 듯 합니다. (관련포스팅: 1. 줌머인 2. 카친족)
공익법센터 어필은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중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박해를 받고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3인-김구, 안창호, 홍범도(가나다 순)의 독립운동기를 이들이 박해를 받아 망명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간단히 소개하려 합니다. 매일 밤 고국의 땅을 그리며 독립을 염원하던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소망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대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발현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주체가 ‘난민’이라면, 광복 69주년을 기념하며 어필과 함께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난민·난민신청자들을 돕는 것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럼, 광복 69주년 기념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 ‘난민’ 포스팅을 시작하겠습니다!
△ 백범 김구 선생(출처: 네이버캐스트)
김구 선생은 1908년, 비밀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침탈을 막기 위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애국 인사에 대한 탄압 수위를 높였고, 김구 선생은 191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은데다 ‘안악사건(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발각된 사건)’에 연루되어 15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습니다. 감형되어 1915년에 석방이 된 뒤에도, 3.1운동이 발생한 후 김구 선생에 대한 감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에 선생은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하여 사리원, 신의주, 중국 안동을 거쳐 배를 타고 중국 상해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백범은 상해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가담하여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을 창설하고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휘했으며,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선출되는 등 해외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처음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세워진 것 역시, 서울의 한성정부보다 지리적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영사관이 있어 조계지(외국인이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구역)가 넓게 형성되어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기 수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백범이 상해로 망명한 이후에도 그를 죽이기 위한 스파이들이 포진해있었다고 하는데요, 윤봉길과 이봉창의 거사가 김구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언론에 발표됨에 따라 김구는 상해에서 탈출하여 피신한 적도 있으며, ‘장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 도산 안창호 선생 (출처: 네이버캐스트)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선생은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건립하였는데, 1909년 대한제국의 황제 융희황제가 이 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일장기를 들고 환영하라는 일본의 명을 거부하여 일제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909년 10월, 일본은 안창호 선생이 대표로 있는 신문 <대동공보>에서 안중근이 의거를 모의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이토 히로부미 총격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 체포하였습니다.
도산은 1909년 말 석방되었으나 이듬해 초에 재소환되는 등 일제가 경계하는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그가 부회장으로 있던 항일 비밀결사단체 신민회 역시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활동이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도산은 1910년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중국의 위해위로 탈출하였습니다. 이후 안창호 선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백범과 함께 임시정부 운영에 참여하게 됩니다.
△홍범도 장군 (출처: 네이버캐스트)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던 일본군에 맞서 무력저항했던 의병봉기가 을사의병(1905)과 정미의병(1907)으로 그 세가 전국적으로 퍼지자 일본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포급화약류단속법’을 제정, 의병의 총을 회수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홍범도 장군은 의병을 조직하여 유격술로 일본군을 대파시켰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후하여 국내에서의 의병이 초토화되자 홍범도 장군은 국내 의병활동을 접고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것으로 잘 알려져있는데요. 그는 일본군 수비대를 격멸한 대장군이었지만, 이념정쟁에 휘말려 자유시 참변(1921) 이후 러시아 적(赤)군 하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1937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또다시 강제이주를 당하였습니다. 일본군을 궤멸시켰던 독립군의 수장이었던 홍범도 장군은, 이후 카자흐스탄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농장을 운영하고, 고려인 극장의 수위로 일하며 만리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꿈에 그리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독립운동가 3인의 ‘박해’기를 아주 간단히 소개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백범, 도산,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겪은 고초와 박해는 셀 수없이 많지만 이 정도밖에 싣지 못한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열강들이 식민지를 거느리던 20세기 초반, 특히 일본은 식민지 한반도를 악랄한 방식으로 탄압·수탈했던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 중 ‘요주의 인물’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이 받았던 박해는 이루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공포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거주지에서의 정치활동, 사회활동을 포기하고 망명을 선택했던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내전 등으로 인해 각종 폭력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합법·비합법적 수단을 가리지 않고 본국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난민들은 비록 시대적 맥락은 다르지만 삶 전반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광복 69주년을 기념하며, 100여년전 선조들이 받았던 박해가 아직 지구상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더 나아가 한국에 체류하는 난민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난민들의 말못할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며 이들에게 진심어린 격려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이 제안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어필 연간보고서 ‘제법이다’에 어필과 인연을 맺은 난민들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정리되어 있고, 자세한 정보는 어필 홈페이지 곳곳에 나와있습니다.
(7기 인턴 이근옥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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