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이 변호사와 함께 지난 6월 29일부터 7월 10일까지 이탈리아 산레모의 국제인도법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of Humanitarian Law에서 열린 제26회 Sanremo Summer School에 다녀왔습니다.
2주 동안 진행된 이번 과정은 국제인도법, 국제인권법, 국제형사법, 이주·난민법, 재난법 등 무력충돌과 인도적 위기에 적용되는 여러 국제법 분야를 함께 다루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첫째 주에는 국제인도법의 기본 원칙과 무력충돌의 분류, 전투 수단과 방법, 점령, 개인 및 지휘관의 책임, 전쟁범죄와 국제형사법,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의 관계 등을 배웠고, 둘째 주에는 난민의 국제적 보호 체계, 난민의 정의, 혼합 이주mixed movements, 기후변화와 강제이주, 난민면접, 해상에서의 보호, 항구적 해결책durable solutions와 보충적 수용경로complementary pathways 등을 다뤘습니다.
저는 어필에서 주로 이주·난민 분야를 들여다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가기 전에는 둘째 주 이주·난민법 강연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녀오고 나니 어떤 의미에서는 첫째 주 강연이 더욱 의미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민의 이야기는 난민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난민의 이야기는 난민신청을 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력충돌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이 작동하고, 문제되는 박해가 전쟁범죄나 반인도적 범죄 등에 이를 경우 국제형사법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피난한 사람이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는 난민법뿐 아니라 이주, 인신매매, 밀입국 등을 규율하는 국제규범이 함께 적용될 수 있고, 도착한 뒤에는 다시 난민법과 국제인권법에 따른 보호가 문제됩니다.
그래서 각각의 법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강제이주의 원인에서 이동의 과정, 도착 이후의 보호에 이르기까지 관련 법체계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프로그램 내내 이어졌습니다.
난민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난민인 것이 아니라 난민이기 때문에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임을 익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난민 실무를 매일 하다 보면 난민법의 언어에 갇힌 상태로 어떤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보다 훌륭하다'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간혹 하는데, 산레모에서의 2주 동안 농담이 농담만은 아닌 순간이 유독 많았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수업 중 밀입국 알선자smuggler를 이용해 국경을 넘은 난민에게 그와 같은 입국을 이유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질문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하 '난민협약'이라 합니다) 제31조를 떠올렸습니다. 더 정확히는, 난민협약 제31조'만'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수업에서는 「육상, 해상 및 항공을 통한 이주자의 불법이민 방지를 위한 의정서」 제5조가 함께 다루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사자가 난민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이 난민법뿐일 리 없습니다. 때로는 국제인권법이 난민법보다 더 높은 수준의 보호를 제공하기도 하고,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는 난민법과 이주법, 인신매매·밀입국 관련 국제규범이 함께 작동합니다. 그런데 한 분야에서 계속 일하다 보면 이 당연한 사실을 꽤 능숙하게 잊게 되는 모양입니다.
산레모에서 반가운 인연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일전에 국제형사재판소의 Office of Public Counsel for Victims(OPCV, 우리나라 제도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피해자 국선변호인과 유사한 역할을 합니다)에서 잠시 인턴으로 일하였는데, 바로 이 OPCV의 수장인 파올리나 마시다Paolina Massidda가 이번 산레모 서머 스쿨의 국제인도법 위반 및 전쟁범죄, 국제형사법 절차에 관한 수업의 연사로 온 것입니다. 파올리나와의 재회로 과거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의 내용도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강제이주의 '결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난민 이슈를 계속 들여다보니, 그 결과를 야기한 '원인'을 살펴 보고 싶다고 썼었는데, 그 뒤 다시 어필에서 난민 이슈를 보다가 산레모에서 파올리나의 국제형사법 수업을 들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국경의 모양이 다르면 난민 실무도 달라진다
난민법 수업은 첫째 주 수업에 비해 익숙한 내용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낯선 것도 많았습니다. 특히 제가 알고 있던 난민 실무가 얼마나 특정한 지리적 조건 위에 놓여 있는지가 특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장 먼저 신기했던 것은 '해상에서의 보호'에 한 세션 전체가 배정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수색 및 구조에 관한 국제규범이 등장하고, 난민과 인신매매 피해자, 밀입국된 이주민smuggled migrant, 이주노동자 등이 함께 이동하는 혼합 이주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로 피난하는 난민의 대다수가 항공편을 이용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끔 위조 여부가 문제될지언정 어쨌든 여권 등 신분 증명 서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면 육로나 해로를 통해 여러 국가의 국경을 넘는 이동이 흔한 지역에서는 그 사람의 신분을 어떻게 확인·확정할지, 난민과 다른 이주민을 어떻게 구분할지, 바다에서 구조된 사람을 어느 국가가 보호해야 할지, 여러 국가를 거쳐 온 사람에게 어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할지와 같은 문제가 훨씬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었습니다.
난민을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보이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이번 과정에는 법률가뿐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인도적 지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특히 대규모의 난민을 수용하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참가자들도 있었습니다. 각자 경험해 온 난민 문제의 지평이 다르다 보니 국제규범을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씩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차이가 주로 법률가와 비법률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난민'의 법적 정의가 어디까지인지, 어떤 요건이 충족되어야 하는지, 문언을 어떻게 해석하여 개별 사안에 적용할 것인지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업을 들을수록 그 차이는 단순히 직업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가자의 상당수가 유럽 출신이거나 혹은 아프리카의 주요 난민 수용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훨씬 높은 난민인정률을 보이는 유럽의 여러 국가나 매우 많은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는 아프리카의 수용국에서는 '이 사람을 난민으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절실하게 이미 그곳에 있는 난민들이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일하며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것인가가 문제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는 업무에서 비롯되는 차이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크게는 어떤 난민들을, 난민보호의 어느 단계에서 만나고 있는지 여부가 각자의 문제의식을 달리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토론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어떤 참가자들은 난민협약이나 국제인권법이 이러이러한 권리를 규정하고 있으니 국가는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데서 말을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현실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제가 너무 현실에 익숙해져 그 현실을 사고의 출발점뿐 아니라 한계선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국제협약에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실제 권리의 모습은 국내법과 행정관행, 법원의 해석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어필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일 변호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무엇이 이상적인 상태인지, 무엇이 원칙적으로 옳은지를 알아야 현재의 법해석과 관행을 어느 방향으로 수정해 나갈지도 알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즉, 실무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현재의 실무가 어디까지 허용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과 현재의 실무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국제규범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일 것입니다.
앉아서 듣는 것만이 수업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과정에서 특히 재미있었던 수업 두 개를 꼽으라면 난민 면접 기술 관련 수업과 난민 지원을 다룬 수업에서 한 참여형 활동을 고를 것 같습니다.
난민 면접 기술 수업에서는 강사들이 직접 면접관, 난민신청인 그리고 통역인의 역할을 맡아 난민면접 상황을 연기했습니다. 한 장면을 진행하다가 중간중간 멈추면 참가자들이 방금 면접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했고, 강사들은 그 의견을 반영하여 같은 상황을 다시 연기했습니다. 예컨대 면접실 책상에 놓인 물건의 종류와 배치부터 시작하여 면접실 안으로 난민신청인을 안내하는 방식, 질문의 방식이 지나치게 유도적이지는 않았는지, 질문의 순서와 표현 때문에 오히려 진술을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등 다양한 것을 하나하나 짚었습니다. 추상적으로 '좋은 난민면접은 이러해야 한다'고 배우는 것보다, 똑같은 장면이 질문 하나와 태도 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직접 보는 것이 훨씬 와닿았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참여형 활동은 참가자들에게 무작위로 서로 다른 인물의 프로필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나이, 성별, 직업, 학력, 장애 여부 등 조건은 모두 달랐습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프로필을 들고 일렬로 선 뒤, 진행자가 어떤 상황을 하나씩 제시할 때마다 그것에 해당하는 사람만 한 발짝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결과, 처음에는 모두 같은 선 위에 서 있었지만 활동이 이어질수록 간격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고 사회적 자원이 많은 성인 남성의 프로필을 받은 참가자들은 앞으로 많이 나아간 반면, 아동이나 여성, 장애가 있는 사람의 프로필을 받은 참가자들은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활동에 앞서 강사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가 조력자에게 전달되는 방식 자체도 결코 평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그 말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언어화할 수 있고, 기관을 찾아갈 수 있고, 담당자에게 계속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바로 그럴 수 있는 자원과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무자가 실제로 자주 듣는 요구가 반드시 가장 절실한 요구와 일치한다고 전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필요가 잘 표현되고 포착되는지, 반대로 어떤 필요가 구조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지도 보호를 고민할 때 함께 살펴야 한다는 점을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활동이었습니다.
다시 한국의 사건으로
2주간의 교육을 통해 많은 법리와 국제규범을 새롭게 접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수확은 '난민'을 바라보는 질문이 조금 더 많아진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를 난민법만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강제이주의 원인과 이동 과정에는 어떤 다른 국제법 체계가 작동하는지, 제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난민 문제의 모습이 사실은 한국이라는 장소에서 주로 보이는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현재의 국내 실무를 점점 더 알게 되는 것이 어느 순간 그 실무의 한계 안에서만 생각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를 앞으로도 계속 돌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김희진 변호사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