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22년의 어선 노예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온 미안마 선원: AP 기사 (150601)

2016년 6월 7일

 

올해 4월 AP 기자인 마지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인도네시아 해역에서의 노예노동에 관한 기사로 퓰리쳐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더 반가웠습니다. 마지(Margie)는 어필과 IOM이 한국원양어선에서 일하는 이주어 선원들의 노동/인권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갔을 때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상을 받았다고 해서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니 1년간의 조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히 되고, 이런 감동적인 기사를 써주어서 고마웠습니다.

22년 만에 돌아왔다니 태국 어선을 타고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일하는 미안마 어선원들 상황이 몹시 심각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 원양어선을 타는 외국인 어선원들도 무시하지 못한 노동/인권 침해 상황에 놓여져 있으니, 이 기사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AP의 허락을 받고 한국어 번역본을 올립니다. 

   

22년의 노예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온 미얀마 어선원

마지 메이슨(Margie Mason)

2015년 7월 1일

인도네시아 뚜알(TUAL)

원문 링크: http://www.ap.org/explore/seafood-from-slaves/myanmar-fisherman-goes-home-after-22-years-as-a-slave.html

   그의 부탁은 그저 집으로 보내달라는 것뿐이었다.

이 버마인 노예가 이런 부탁을 했을 때, 그는 거의 죽을 정도로 구타를 당했다. 하지만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8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배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지만, 미엔 나잉(Myint Naing)은 그의 어머니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수 있었다. 매일 밤마다 그는 어머니 꿈을 꾸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의 얼굴은 그의 기억에서 서서히 흐려져 갔다.

그래서 미엔은 어느 날 바닥에 엎드려 선장의 다리를 손으로 붙잡고 풀어달라고 호소하였다. 태국인 선장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미엔이 배를 버린다면 죽을 것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미엔을 갑판에 내팽개치고 그의 팔과 다리를 사슬로 묶었다.

미엔은 3일 동안 음식도, 물도 없이 낮에는 내리쬐는 태양 아래 타는 듯한 고통을 받았고, 밤에는 추운 비 속에서 떨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동안 보아왔던 것처럼, 물 속에 던져 해안서 쓸려 가도록 놔둘까? 총으로 쏠까? 아니면 그냥 머리를 세게 후려칠까?

그는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사라질 것이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어디서 찾아야 할 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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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미엔 같은 수천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속거나 또는 팔려서 어업 시장의 어두운 뒷 세계로 끌려가고 있다. 비양심적인 기업들이 전세계에 있는 거대 매장 및 상점들에 수산물을 공급함에 있어 노예 인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잔인한 거래는 동남아시아 바다에서 수십 년간 공공연히 지속되어 왔다.

이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사업에 대해 AP는 1년 간 조사를 하면서 340명이 넘는 현직, 그리고 전직 노예들을 대면 또는 서면 형식을 통해 인터뷰했다. 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서로가 놀랄 정도로 일치했다.

미엔은 마르고 나긋나긋한 말씨를 지녔지만, 일평생 동안 뼈 빠지게 일하며 살아왔을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병으로 인해 그의 오른 팔 일부가 마비되었고, 그의 입이 앙다물어질 때 반쪽 자리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엔과 그의 사촌들이 들려주는 그의 22살의 여정 가운데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웃음을 터뜨릴 때, 그 웃음으로부터 한 때는 소년이었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엔은 미얀마 남쪽 몬(Mon) 주의 좁고 먼지투성이인 길 끝 작은 마을에서 4명의 형제와 두 명의 자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90년에 그의 아버지는 물고기를 낚다가 익사하였고, 그는 겨우 15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식구들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요리를 도왔고 빨래를 했으며 그의 동생들을 돌봤지만, 그의 식구는 점점 가난해져 가기만 했다.

그래서 3년 후에 한 말솜씨가 좋은 브로커가 동네를 방문하여 태국에서의 일자리에 관하여 이야기했을 때, 미엔은 쉽게 설득 당하고 말았다. 그 브로커는 몇 달 동안의 일을 대가로 300달러를 제안하였는데, 그 정도면 몇 식구가 일년은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액수였다. 미엔과 몇몇 다른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겠다며 재빨리 손을 들었다.

미엔의 어머니 킨 탄(Khin Than)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들은 어떠한 교육이나 여행 경험도 없는 그저 18살의 소년일 뿐이었다. 하지만 미엔은 일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거기서 이미 일하고 있는 친척들이 그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의 어머니를 계속 졸랐다.

결국 그녀는 아들의 결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들 중 누구도 미엔이 그의 가족으로부터 몇 천 마일 떨어진 곳으로의 여정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미안마에 없는 동안 여러 탄생과, 죽음, 결혼, 그리고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조국의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의 변화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이 결코 공포의 그늘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선에서의 무자비한 강제 노동으로부터 두 번이나 도망치게 될 것이다.

1993년의 그가 집을 떠나던 당일, 미엔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브로커는 그의 새로운 노동자들에게 짐을 빨리 챙기라고 독촉하였고, 미엔의 10살 된 여동생은 그녀의 오빠가 먼지투성이인 길을 따라 마을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미엔의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그의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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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특히 버마라고도 불리는 미얀마 같은 나라들을 포함하여 가장 가난한 곳으로부터의 인력에 의존하는 수산업 시장에서 매년 7억 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인다. 대부분이 체류자격 없는 이민자인 약 200,000명 가량의 이주민들이 바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잡아들인 물고기는 지구 반 바퀴를 거쳐 미국, 유럽, 그리고 일본의 저녁 식탁이나 고양이 밥 그릇에 올려진다.

물고기 남획으로 인해 태국 연안의 수산 자원의 씨가 마르자, 어선들은 어쩔 수 없이 더욱 먼 곳으로 나아가 넓은 타국 영해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주민들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선장이 운영하는 일종의 떠다니는 감옥에 갇힌 채, 위조된 태국 신분 증명서를 가지고 몇 달 또는 몇 년을 바다에서 지내며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한다. 태국 관리들은 이를 부인했지만, 이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행태를 눈감아 준 것에 대한 비난을 받아오고 있었다.

태국 국경에서 경찰의 눈을 간단히 피하고 한 달이 넘게 작은 창고에서 약간의 음식과 함께 생활하던 중, 미엔은 보트에 태워졌다. 그를 비롯한 선원들은 15일 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인도네시아의 동쪽 끝 언저리에 도착했다. 선장은 배에 승선한 모든 이들이 이제부터 자기 소유라고 외치며 당시 미엔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말을 하였다.

“너희 버마놈들은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팔린 몸이고, 누구도 너희를 도와주러 오지 않을 것이다.”

미엔은 겁에 질렸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겨우 몇 달 정도 태국 영해에서 고기 잡는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대신, 그를 포함한 소년들은 참치, 고등어, 오징어, 새우, 그리고 다른 수익성 있는 수출용 수산 자원들이 가득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황금 어장 중 하나인 아라푸라 해의 뚜알 섬으로 와 있었다.

                                                                                        

미엔은 망망대해에서 오직 쌀, 그리고 잡힌 물고기 중 어느 누구도 먹지 않을 것 같은 부분만을 먹으며 몇 주를 지냈다. 가장 바쁠 때에는 선원들이 생선이 파닥이는 무거운 그물을 끌어올리며 하루 24시간 동안 일을 해야 했다. 또한 그들은 불쾌한 맛이 나는 끊인 바닷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미엔은 한 달에 겨우10달러의 임금을 지불 받았으며, 어떤 때는 그마저도 받지 못했다. 약 또한 없었다. 누구든지 휴식을 취하거나 병에 걸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는 타이 선장에게 구타당했다. 선장은 미엔이 생선을 빨리 나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나무토막을 던지기도 했다.

AP 통신의 조사에 응한 버마인 중 거의 절반이 자신이 직접 구타당했거나, 또는 다른 이가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선원들은 거의 무보수로 쉴 새 없이 일했으며, 음식은 부족했고 물은 더러웠다. 그들은 독성을 띈 가오리의 꼬리로 채찍질을 당했고 전기 충격기 같은 장치로 감전을 당했으며, 휴식을 취하거나 도망치려고 한 경우에는 우리에 감금되었다. 선원들에 의하면, 때때로 도중에 죽은 선원들의 시신은 생선들과 함께 배의 냉동고 안에 숨겨졌다.

몇몇 보트의 일꾼들은 배의 느린 운행 속도나 또는 배에서 떠나려고 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버마인 어부들은 다른 이들이 탈출구를 찾지 못해 그들 스스로 배 밖으로 몸을 던졌다고 했다. 미엔 또한 몇몇 부푼 시신들이 물 위에서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3년이 지나 1996년이 되었을 때, 미엔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무일푼 상태에 향수병에 걸린 채, 그는 그의 배가 뚜알 섬으로 돌아가길 기다렸다. 그 후에 그는 항구에 있는 사무소에 가서 처음으로 집에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두개골을 강하게 내리치는 헬멧이었다. 피가 머리에서 솟아나오자, 그는 양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그를 헬멧으로 내리친 태국 사람은 이미 그의 뇌리에 박힌 말들을 되풀이 했다.

“우리는 너희 버마인 어부들을 절대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다.” 그 때가 미엔이 첫 번째로 탈출을 시도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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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 섬으로도 알려진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the Maluku chain)를 따라 흩어진 섬들에서, 배에서 탈출하거나 또는 그들의 선장으로부터 버림받은 수천 명의 이민자 어부들이 조용히 정글로 숨어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토착 여성들과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기도 했는데, 어느 정도는 노예 사냥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할 목적이었다. 분명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것만이 자유를 되찾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 인도네시아 가정이 미엔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가 나을 때까지 보살펴 주었고, 그들의 농장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먹을 것과 보금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5년 동안 그는 이러한 간소한 삶을 살면서 바다에서 있었던 그의 끔찍한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언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웠으며, 현지 음식에도 맛을 들였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차려주던 다소 짠 버마 음식들에 비하면 무척 달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미얀마에 있는 그의 친척들, 그리고 배에 남겨진 그의 친구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직도 살아 있는 걸까?

가끔씩 미엔은 그가 직접 기른 야채가 가득 든 큰 가방을 가지고 섬에 있는 다른 버마인 탈주 노예들을 찾아 다니며 그의 집에 대하여 물어보려고 하였다.

“그는 돌아다니는 걸 조금은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뚜알 섬의 또 다른 버마인 노예였던 나잉 오(Naing Oo)가 그를 떠올리며 말했다. “고기잡이 배에서의 삶은 정말 끔찍했거든요.”

한편, 그를 둘러싼 세계는 변화하는 중이었다. 1998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장기 집권 독재자인 수하르트가 실권했으며, 온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미엔은 배에서의 상황 또한 혹시 더욱 나아지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2001년에 그는 한 선장이 자신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어부들을 미얀마로 돌려 보내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미엔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리하여 그가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도착한 지 8년 만에, 그는 바다로 돌아왔다.

배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신이 같은 덫에 또 다시 걸린 것을 깨달았다. 일과 노동 환경은 처음의 상황에서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할 만큼 끔찍했고, 임금 또한 여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노예 문제가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는 것이었다. 태국은 빠르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수산물 수출국으로 성장했고, 그만큼 싼 인력이 더욱 많이 필요해졌다. 브로커들은 아동, 병자, 그리고 장애인 등을 포함한 이주민 노동자들을 속이고 협박했으며, 때로는 심지어 약을 먹이고 납치하기까지 하였다.

바다에서의 9개월이 지나자, 미엔의 선장은 그가 했던 약속을 깨고 선원들에게 그들은 태국 밖으로는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찬 채, 버마인 노예들은 선장에게 다시 한번 집으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미엔이 말하길, 그 때가 선장이 자신을 사흘간 배에 사슬로 묶어 놓은 때였다.

미엔은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자물쇠를 풀 만한 것을 미친 듯이 찾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자물쇠를 풀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는 결국 작은 금속 조각 하나를 급하게나마 송곳 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몇 시간을 걸쳐 신속하게, 그러나 조용히 자유를 향한 빗장을 끄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찰칵 소리가 들리고 족쇄가 벗어졌다. 미엔은 그에게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았다. 만일 잡힌다면 그는 바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밤 12시가 조금 지나서, 그는 검은 바다로 뛰어들어 해안으로 헤엄쳐 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옷이 바닷물에 젖어 아직 무거워져 있는 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미엔은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번에는 좋은 쪽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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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수산업 시장에서의 노예 무역은 끈질기게 지속되어오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에 대한 소식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미국 정부는 매년 연간 보고서를 통해 수산업 시장에 만연한 노동 착취에 대하여 태국을 질타했다. 그러나 노예 무역은 계속되었고, 삶이 망가진 이들은 도저히 자유로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의 도망을 감행한 후, 미엔은 혼자서 밀림 속 대나무 오두막으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3년이 지난 후, 그는 뇌일혈로 보이는 증상을 앓기 시작했다. 그의 신경이 몸을 데워주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엔은 숨막힐 듯한 열대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쉽게 추위에 떨곤 했다.

그가 일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을 때, 어느 인도네시아인 가정이 미엔에게 있어 마치 집에 있는 친척들을 떠올리게 하는 자상함으로 그를 돌봐 주었다. 그는 이제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으며, 그가 가장 좋아했던 어린 여동생이 지금쯤이면 다 컸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아마 자신이 죽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엔이 몰랐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저 그가 생각했던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동네에 있는 전통 가옥으로 지어진 작은 불교 제단에서 그녀의 아들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했고, 매년 점쟁이들에게 미엔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아들이 살아 있다고 확신시키며, 다만 그가 떠나기 어려운 머나먼 먼 곳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느 시점에 다른 버마인이 미엔의 가족에게 미엔이 인도네시아에서 고기를 잡고 있으며, 그가 결혼하였다고 얘기하였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에 있던 미엔은 결코 그의 삶을 망가뜨린 나라에 매여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인도네시아인 아내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내 고향 미얀마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미엔이 말했다. “젊은 날의 내 인생이 사라졌어요. 하지만 나는 그저 내가 다른 곳이 아닌 버마에서 아내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계도 달력도 없이 밀림에서 8년을 더 지내면서, 시간이 점차 흐려져 갔다. 그의 나이가 30대에 이르게 되자, 미엔은 선장의 말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탈출구는 없었다.

그는 경찰이나 지역 공무원들이 돈을 받고 그를 선장에게 다시 넘겨줄 것이 두려워 그들에게 갈 수도 없었다. 집으로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미엔은 미얀마 대사관으로 연락하는 것 또한 어려워했는데, 그가 불법 이민자로 비쳐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2011년, 미엔은 깊어져 가는 고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더 많은 버마 인들이 있다고 들은 도보 섬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다른 두 명의 도망 노예들과 같이 고추와 가지, 콩, 그리고 완두콩들을 경작하며 지냈지만, 어느 날 경찰이 그들 중 한 명을 시장에서 잡아 배로 돌려보내면서 일이 무산되고 말았다. 배로 돌려보내진 사람은 바다에서 병을 얻어 결국 죽고 말았다.

하지만 미엔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련은 그가 살아남으려면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4월의 어느 날, 한 친구가 미엔에게 새 소식을 전해주었다. 수산 시장에서의 노예제와 미국에서 가장 커다란 식료품점 및 애완동물 사료 회사들 중 일부와의 연결 관계를 밝혀낸 AP 통신 기사가 인도네시아 정부로 하여금 섬에 있는 현, 그리고 전직 노예들을 구출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이 넘는 노예들이 발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것은 미엔에게 찾아온 기회였다. 인도네시아 관리들이 도보 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들의 뒤를 쫓아 그가 이전에 노예 생활을 했던 뚜알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예가 아닌 다른 수백 명의 자유인의 대열에 끼기 위해서였다.

인도네시아에서의 22년이라는 세월 끝에, 미엔은 그렇게 마침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돌아가면 그의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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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엔은 인도네시아에서 미얀마의 제일 큰 도시인 양곤으로의 비행이 처음에는 무섭게만 느껴졌다. 공항을 걸어 나오면서 그가 가지고 온 것은 그의 오랜 타지 생활을 보여주는 작은 검정 여행 가방, 그리고 기부 받은 모자와 셔츠가 전부였다.

미엔이 돌아왔을 때 그의 고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로 변해 있었다. 미얀마는 더 이상 비밀스러운 군사 정부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 않았고, 야당 지도자였던 아웅 산 수지는 몇 년 동안의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의회에 입성해 있었다.

화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엔은 인도네시아 돈 15,000루피를 미얀마 돈 1,000차트로 바꾸는 데 애를 먹었다. (양쪽 다 약 1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마치 여행객이 된 것 같네요” 땀이 그의 얼굴과 가슴을 타고 흘러 내리면서 미엔이 말했다. “제가 인도네시아인이 다 된 것 같아요”.

음식도 인사도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계속 기도 자세로 손을 모아 절을 하는 버마식 인사가 아니라, 악수를 하고 자기 가슴에 손을 얹는 인도네시아식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말조차도 이상하게 들렸다. 그가 다른 전직 노예들과 몬 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모국어인 버마어가 아닌 바하사 인도네시아로 떠들고 있었다.

“나는 인도네시아어를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요. 거기서 너무 많은 고통을 당했는걸요.” 미엔이 말했다. “나는 이제 인도네시아어가 싫어요” 그러나 그의 입에선 그도 모르게 계속 인도네시아어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가 들어가곤 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고국이 변하였듯이 미엔 또한 변했다. 그가 집을 떠났을 때는 소년이었지만, 돌아왔을 때는 한동안 노예로 잡혀 있다가 그의 인생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도망 다녀야만 했던 40살 중년이 되어 있었다. 미엔 혼자만이 그의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 미엔은 그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너무 긴장이 되어 밥도 먹을 수 없었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고, 그의 목에 걸려 있는 하트 모양의 전복으로 만든 펜던트를 계속 문질러 댔다. 결국 감정이 북받쳐 참을 수 없게 되자, 미엔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너무도 불행했어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는 목이 매어 간신히 말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미엔은 그가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알아볼 수나 있을지, 또는 그들이 그를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한 시간이 흘러서, 미엔은 낙담한 채 그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어느 길로 가야 될 지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이전의 길들은 이제 포장되었고 새로운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는 경찰서를 발견하자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기쁨에 겨워 몸을 꿈지럭 대기 시작했다. 미엔은 그가 집에 거의 다 왔음을 알았다.

마침내, 그가 탔던 차가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미엔은 그가 겨우 하루 전에 받았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까마득한 시간이 흐르기 전에 익숙하게 오가던 길에서 어떤 한 통통한 버마 여인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여동생이었다.

미엔과 그의 여동생은 설움에 북받쳐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기쁨인 동시에, 그들이 그 동안에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었다. “오빠, 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되다니 너무 기뻐요!” 그녀가 흐느꼈다. “돈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그저 가족이 필요할 뿐이에요. 이제 오빠가 돌아왔으니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자리에 없었다. 미엔은 애타게 길을 다시 살폈고, 그의 여동생은 서둘러 전화번호를 눌러댔다.

그리고 멀리서 회색 줄무늬의 머리를 가진 작고 노쇠한 여인이 달려왔다.

미엔이 그의 어머니를 발견했을 때, 그는 울부짖으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땅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녀의 팔로 미엔을 안아 올리고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든 것이 지나갔다는 듯이 그녀의 아들을 달랬다.

그들이 너무도 크게 울며 통곡하자, 온 마을 사람들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나오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20년 동안 마을을 떠나 있었대” 한 마을 주민이 말했다.

미엔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은 서로 팔짱을 낀 채 그의 어릴 적 추억이 새겨져 있는 가옥으로 이동했다. 미엔은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의 어머니와 동생은 악한 영들을 씻어 보내기 위해 물을 길어 전통적인 타마린 비누와 함께 미엔의 머리를 씻겼다.

여동생이 미엔의 머리를 씻겨 주는 동안, 그의 60살 된 어머니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대나무 사다리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그녀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더니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친척들과 이웃들이 급하게 그녀에게 부채질을 하면서 물을 떠 오고 라임을 가져와 냄새를 맡게 했지만, 그녀의 눈은 이미 뒤집힌 상태였다. 누군가가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젖은 채 미엔은 그의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녀의 입에 숨을 세 번 불어넣었다.

“제발 눈을 뜨세요! 눈을 뜨세요!” 미엔이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소리질렀다. “이제부터 제가 엄마를 모실게요!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께요! 더 이상 엄마가 아프신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저 집에 왔어요!”

어머니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미엔은 그녀의 두 눈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미엔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다시는 그 얼굴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의 출처

미엔 나잉의 이야기는 구출된 노예들을 위하여 인도네시아 뚜알 섬 항구에 세워진 임시 캠프로부터 그의 고향인 미얀마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중 그와 그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다른 전직 노예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개되었다. 그는 일 년 간의 수사 기간을 거쳐 동남아시아 수산업 시장의 가혹한 노동 착취 실태를 밝혀낸 AP통신의 보도 후 구출되어, 그들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수백 명의 노예 중 한 사람이다. AP기자들은 노예 노동을 통해 잡힌 생선이 어떻게 인도네시아에서부터 태국까지 운송되는지를 문서화하여 정리했다. 그 후 생선들이 미국으로 수출되어 월마트, Sysco, Kroger 등을 포함한 슈퍼마켓 및 유통업자, 그리고 Fancy Feast, Meow Mix, Iams 같은 애완동물 사료 브랜드의 공급망을 통해 유통된다. 해당 회사들은 그들이 노동 착취를 강하게 규탄하며, 이를 방지할 대책을 세워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을 하곤 했다.

  (정창대 어필 자원봉사자 번역)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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