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명의 특별기여자’ 그 기이한 용어의 비밀과 파장

2021년 8월 31일

성공적이고 유례없는 작전 미라클을 통해 390명의 아프간 난민 가족이 26일 한국 땅에 도착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파병 및 지역재건사업에 파병국이었던 한국 정부 측 기관에 고용되어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탈레반이 최후의 승자가 돼 돌아오자 부역자로 평가돼 살해, 고문 등 잔혹한 처우가 예상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치적 의견 혹은 전가된 정치적 의견(imputed)으로 인해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1951년 난민협약이 정한 난민(Refugees)이다. 개별 나라마다 관련 비자 카테고리의 이름이 다르긴 하나, 이들이 난민인 것은 변함이 없다. 소위 박해의 위험이 있는 난민들을 직접 데려와 정착시키는 제도 즉 난민재정착(Resettlement)의 일환으로 인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390명은 위험이 없지만 특별한 기여가 있어서 군사작전으로 수송한 것인가? 아니다. 박해를 받을 난민들이기 때문에 급하게 수송한 것이다.

 

특별기여자란 무엇인가

이들은 최초 ‘아프간 난민’이라고 언급되었다가, 외교부 2차관 브리핑에서는 ‘난민이 아닌 특별공로자’라는 표현이 나왔고, 다음 날 법무부장관의 브리핑부터는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라고 불리고 있다. 표현도 생소한데, 난민을 난민이 아니라고 계속 언급하는 것도 의아하다. 사용된 적이 없던 이 표현은 많은 추측과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일부 외신에서는 ‘persons of special merit’라고 존중의 표현을 담은 것으로 해석하면서, 일부 찬사도 있었다. 그런데 과연 존중을 위해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라고 부른 것일까? 물론 법무부에서는 난민 심사 통과의 어려움과 함께 특별기여자가 난민보다 생계비와 정착지원금 등에서 배려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거기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래와 같은 이유로 난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첫째, 해외에서 난민을 데려와 수용한다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2018년 예멘 난민들의 피난 때 일부 여론으로 표출된 혼란 때문이다. 과열된 낯섦과 혐오는 거의 사라졌지만, 정부는 아직도 이것을 기억하고 있다. 2019년 기준 0.3%, 2020년 기준 0.4%의 난민인정률로 1년에 난민을 100명도 보호하지 않고 있는 나라(2020년 기준 55명)에서, 공항에서도 난민신청했다가 구금되고, 박해의 위험 명확한 시리아 난민들에 대해서도 인도적 체류라는 이름으로 난민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390명의 난민을 직접 데려온다고? 혹시 모를 파장을 정부는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난민 데려오는 것 아니니 너무 뭐라고 하시지 마세요.’

둘째, 이들은 ‘일반적인 난민과 다르다’라며 특별히 한국정부가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여론을 설득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향후 많은 부정적인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이 있다. ‘왜 난민을 보호해야해?’ 라는 여론이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한, 해외에서 직접 피난시키는 행위에 대해 단지 반대여론을 차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설득까지 해야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은 파병국으로서 위험의 원인을 제공한 한국정부의 책임이 당연한 사안이지만, 그것보다 ‘(무용한 난민이 아닌) 특별한 능력과 기술을 가졌고’, ‘(무관한 난민이 아닌) 한국정부에 공헌을 하였고’. ‘(가짜 난민이 아닌) 우리가 같이 일했던 믿을만한 사람들’이라며 설득을 해보려고 한 것이다. 한국사회를 떠받치는 차별적 능력주의는 이렇게 정부 관계자들의 공식적 발표를 타고 난민들에게까지 미친다.

셋째, 실제로 그냥 난민과 ‘유용한 난민’을 구분하고 싶었던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한국 정부는 난민을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 다양한 절차에서 드러나는 난민거부정책이 실질적으로 작동한다. 한국 정부에는 이민정책이 없다. 외국인정책만 있을 뿐이다. 외국인을 이민시키려는 의사도 정책도 없다. 오로지 유용한 전문기술인력을 한국에 제한적으로 이주시키기를, 결혼이주민을 일부 이주시키기를 원할 뿐이다. 고용허가제 하에서 외국인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취급된다. 막 부려도 망가지지 않을 젊은 날의 노동력만 취하고 추방할 노동력이다. 결혼이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라 농어촌을 중심으로 결혼을 장려하여 한국 민족의 재생산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취급된다.

난민은 역시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도 정상적인 국가로 인도적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 활용되는 도구다. 그래서 어느덧 이들은 ‘특별한 기여’가 있는 사람들로 갑자기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한국 정부가 보였던 기존의 모습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현지인 조력자를 난민으로 피난 시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선 예전부터 있던 제도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신속한 카불 함락 과정에서,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작전을 급히 수행해야 했다. 따라서 원칙적 절차인 난민법의 재정착희망난민제도를 다 따라가기 어려운 실무적 난점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특별기여자라는 용어로 추진하긴 하지만 실제로 ‘난민인정자’와 동일한 법적 권리를 부여하고, 실무상으로는 초기정착을 위한 도움을 더욱 얹을 것으로는 보인다. 원래 재정착 난민제도가 그렇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공익의 증진에 이바지한 외국인에 대해서 난민인정자와 동일한 체류자격인 거주(F-2)를 부여할 수 있는 출입국관리법 시행령을 8월 26일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원래 법령으로 존재하는 재정착희망난민제도를 활용할 수도 있었고, ‘특별한 기여가 있는 난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는데 어차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할 것인데도, 난민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빙돌아 새롭게 ‘특별기여자’라는 체류자격을 새로 만든 것이다.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라는 호칭이 가져올 명암

꼬인 스텝이 가져올 법적 문제도 몇 가지 있으나, 그것보다 큰 틀의 문제가 있다. 정부의 메시지는 난민제도를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난민혐오를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난민 제도의 취지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할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고 차별없는 보호가 핵심이다. 국적도, 기여도, 인종도 무관하다. 그와 같은 차별이 낳는 박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난민제도이기 때문이다. 미라클 작전에 내포된 난민제도의 의미 역시 한국 정부에 기여한 사람에게 안전이라는 대가를 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박해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 단지 그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정부는 난민협약이 정한 그냥 난민이 아닌 ‘한국정부에게 요긴한, 한국정부에 공적을 세운 난민’만을 보호할 것인가? 그와 같은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메시지는 한국을 피난처로 삼거나 앞으로 삼을 모든 난민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위급한 상태에 처한 난민들을 ‘시혜적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난민을 돕는 것’과 ‘난민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계보학적 차이가 있다. 난민협약은 ‘난민의 권리’를 인정하고, 국가에는 강제송환금지의무와 난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국가는 의무와 권리에 예속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국경을 관리하고 싶고,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만 선택해서 그들에 대해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를 원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390명에게 난민으로서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시혜를 기다리게 만들면서 한국의 법 위에 두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들에게도 난민에 대한 오해를 정부가 앞장서 불러 일으키게 될 수밖에없다. 파병국으로서 원인제공의 책임이 있는 한국정부가 피난시킨 390명에 대한 책임은 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지만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이미 마찬가지로 가지는 책임이다. 물론 390명의 목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한국으로의 피난은 분명히 감동적으로 평가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인권활동가, 언론인, 소수종교인 등 특히 탈레반의 표적이 되어 특히 위험한 난민들은 살해위협을 피해 숨어다니며 피난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그 자체로 아프가니스탄 역사와 민주주의의 산 증인이었던 인권활동가들은 살해위협을 당하고 있다. 캐나다, 영국, 멕시코 등 다양한 나라에서 그냥 난민들의 재정착을 말하고, 이런 특별한 위험에 놓인 사람들을 더욱 보호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390명의 난민들에 대해서 특별히 기여한 사람들이라고 계속 어긋나게 설명하다 보니, 한국정부의 활동과 무관한 난민들을 피난시켜야 하는 당연한 활동에 대해 국민들에게 아무 얘기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왜 난민이 우리 책임입니까, 라고 말하는 잘못된 발언들에 대해서도 정부가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기여한 사람’만 피난시킨 것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특별한 메리트’가 있는 사람만 골라서 피난시킨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난민협약의 인도적 정신과 반차별주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다. No One Left Behind 룰(누구도 뒤에 남겨놓지 않고 함께 대피한다는 원칙)에 따라 각국이 피난시키는 범위는 한국정부처럼 제한되지 않는다. 책임이 있고 그래서 위험하면 누구도 남겨두어서는 안 되고, “쓰고 버리면” 안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국제사회는, 아프간 전쟁에 참여한 참전국들은 모두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를 말해야 하는 순간들이 올 것이다. 지금도 피난을 요청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은 가파르게 선진국으로 진입해 경제적 이득은 보았으나, 국제사회의 역할은 가급적 피하고 무임승차를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390명의 난민을 난민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그 대가가 앞으로 우려한 대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기고되었습니다.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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