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카친 주(州)에도 봄은 오는가: 무고한 죽음들이 빚은 ‘침묵의 봄’

2012년 4월 30일

‘생태학 시대의 어머니’라 불리는 레이첼 카슨은 1962년에 출판된 그녀의 기념비적인 주저 <침묵의 봄>으로 미국인들의 생태주의적 인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모든 병충해에 대한 만병통치약이자 문명의 승리로 추앙 받던 DDT의 유해성을 남달리 간파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한 그녀의 생물학자로서의 수월성도 물론 이 성과를 내는데 주요했으나, 당시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다름 아닌 ‘침묵의 봄’이라는 짧지만 강한 인상의 어구였습니다. DDT가 생물농축을 통해 먹이사슬의 상층부에 있는 새들에게 축적되어, 종국엔 새들의 시체로 덮인 대지 위에서 어떠한 새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침묵의 봄’이 올 것이라는 묵시록적 예언은 언젠가 예레미아가 그랬듯이 민중의 가슴을 쥐고 뒤흔드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저희 어필은 언젠가 이 세상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던 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충격마저도 가볍게 뛰어넘는 새로운 ‘침묵의 봄’과 조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비단 비인간생물종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 자리들에는 새 소리를 듣지 못해 당혹스러운 침묵을 느끼는 인간조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침묵을 느낄 주체마저도 소거당한 절대침묵의 황량함만이 그 남은 대지를 감싸고 돌고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카친 주와 그 토착민 카친 족(族) 사람들의 현황이 그와 같습니다.

(아래에서 이어지는 카친 족 소개글은 카친 족 출신 난민분께서 직접 영문으로 써주신  것의 번역입니다.)     

<카친(Kachin) 주 지도>   

  카친 주는 버마 최북단에 있는 주로서, 동쪽으로는 중국과, 북서쪽으로는 인도와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버마의 사가잉(Sagaing)구와, 남쪽으로는 샨(Shan)주와 접하고 있습니다. 산세가 험준한 지역에 자리잡은 카친 주는 귀중한 보석의 원석(특히 비취옥), 목재, 광물 등의 자연자원이 풍부합니다. 또 몇몇 중요한 강들이 이 지역을 관류하고 있어서, 이 지역의 생계와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카친 족 지파(sub-tribe)들의 모임>

  카친 족 사람들은 인도-티벳 혈통으로 분류되며, 대부분의 카친 족 사람들은 미얀마 카친 주와 미얀마 북부의 샨 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카친 족 산하에는 다음 여섯 갈래의 족속 지파(Jinghpaw, Laovoh[Maru], Rawang, Lisu, Lachid[Lashi], A Zi[Zaiwa])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카친 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총 숫자는 약 138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카친 족의  Manaw (Ma-Nau) Dane 전통 축제 사진들>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다민족 국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약 5600만 명의 사람들이 미얀마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135개 민족들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이며, 미얀마어를 사용하는 대승불교도 미얀마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족으로 분류되지 않는 민족들은 대게 산악지대에 살며, 전통적으로 저지대 및 미얀마 본토 중심부에 살아온 미얀마족과는 문화적, 언어적으로 뚜렷이 구별됩니다. 미얀마족이 아닌 소수민족들이 인구 전체의 약 40%를 차지하며, 전 국토의 56%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카친 족 사람들은 개신교도, 특히 침례교도이거나 로마 가톨릭교도입니다.

  미얀마 내의 정치적, 민족적 분쟁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6년에 미얀마의 정치 지도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점령했던 잠시를 제외하고는 1824년부터 줄곧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미얀마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였던 아웅 산(Aung San, 민족민주동맹 사무총장 아웅 산 수치의 부친)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소수민족집단들을 미래로 향하는 정치과정에 포함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카친 족은 친(Chin) 족, 샨(Shan) 족과 함께 아웅 산이 기획한 빵롱 회담(Panglong Conference)에 참여하여, 1947년 2월 12일에 빵롱 협약에 서명하는데에 동의하였습니다. 이 협약은 소수민족 주(state)의 국가 연합을 설립하여 해당 주에 대한 해당 소수민족들의 자치권을 부여할 것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947년 9월에 빵롱 협약이 공포된 이후 이 민주적인 지적 흐름을 이어 받아 초안이 작성된 바 있는 1947년의 헌법 또한 소수민족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빵롱 협약의 정신과 내용은 전혀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이상의 공적 차원에서의 협약, 입법 노력들의 실패, 그리고 1947년 7월 19일에 아웅 산과 그의 여섯 각료들이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민간 차원에서의 원초적 무력 분쟁이 촉발되었습니다.

미얀마는 1948년 1월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독립하자마자 무장한 소수민족집단과 독립 미얀마 중앙 정부군 간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소수민족 반군의 목적은 자치권, 분리 독립, 연방 민주주의 실현, 미얀마 내에서의 권리 증진 등으로 매우 다양했습니다. 1962년의 군사정권 쿠데타 이후 약 50년간 이어진 무력 군사 통치에 의해 탈진하여 굴한 국내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이 휴전 협약에 서명하여 지금까지 휴전이 유지되어 오고 있지만 일부 분쟁들은 되살아나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카친 주에서 벌어지는 카친 족의 처절한 독립 투쟁입니다.

카친 주 내 무력 분쟁과 미얀마 정부군의 잔학한 박해: 1961-1994년

카친 족 사람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최소 34년 이상을 무력 분쟁과 함께 보냈습니다. 1961년부터 카친 독립주의자들은 미얀마 정계의 지배야욕이 심화되는 것에 대응하여 미얀마 군사정부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카친독립군(KIA)은 현재 미얀마 전체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민족집단입니다. 카친독립군의 정당인 카친독립기구(KIO)는 민간 행정부를 설치하여 넓은 지역을 통치하고 있으며, 보건부, 교육부, 사법부, 문화부, 구호개발부 및 기타 도시 개발 프로그램들을 통해 주 정부나 다름 없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994년 2월 24일, KIO와 군사정부는 카친주 주도(州都)인 미치나(Myitkyina)에서 휴전 협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협약은 KIO에게 카친 주 내 특별 구역에서의 정치적 자치권을 허용하였습니다. 이 협약은 미얀마족과 카친 족 당국이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법률적 유대관계로 나아갈 것도 요구했습니다. 천연자원 개발의 극적인 증가, 지역 내 인도적 지원과 개발 확대 등도 포함되었습니다. KIO와 미얀마 중앙정부는 KIO만이 다스리는 지역과 미얀마 정부만이 다스리는 지역을 설치하는데에 협의하였고, 분배하고 남은 지역들은 공동 구역으로 두었습니다.

  1994년의 휴전 협약은 공식적인 전투상황을 종결짓는데엔 나름 효과적이었으나, 쌍방의 자발적 평화 협약은 결코 아니었던 까닭에, 미얀마 정부군의 인권 침해, 강제 노역 부과, 여성 성폭행, 강간, 살인, 토지 몰수, 재산 약탈 등의 폭압을 막아주진 못했습니다.

  카친 족 사람들은 1994년 휴전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얀마 정부군에 의해 폭력적 강제 노동, 고문, 살인, 성폭행, 재산 파괴, 토지 몰수 등을 당해온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카친 족 사람들은 미얀마 정부군의 직접적 박해에도 노출되어 있지만 미얀마 국가 전반에 널리 퍼진 인종적 차별과 종교적 차별에도 취약합니다. 많은 카친 족 마을들이 1970-80년대, 90년대 초에 미얀마 정부군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1991년에 미얀마 정부군은 KIA에 맞서는 캠페인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미얀마 정부군은 KIA와 연관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많은 카친 족 민간인들을 집도, 식량도 없이 미얀마 정부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통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제대로 식품과 의복을 공급받거나 수면을 취하지 못해 사망하였습니다. 즉결 처형, 강간, 고문, 강제노동, 재산 파괴 등의 폭력도 당연하다는 듯이 강제이주에 수반되었습니다. 1994년까지 약 6만 명의 카친 족 사람들이 본래 살고 있던 카친 주와 북부 샨 주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약 2만 명은 중국으로, 약 4천 명은 인도로 피난하였습니다. UN난민기구, 국제적십자위원회 등 국제 구호 기구들의 도움이 절실하였으나, 미얀마 정부는 당시 카친 주의 국경 어디에서도 국제 기구들이 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였었습니다.

  이러한 폭력들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상의 비극적 사례들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민족적 화합과 인권의 진전을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세대의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미얀마 정부군의 고질적인 폭력 병폐는 왜 충돌발생지역 부근의 카친 족 마을 사람들이 즉각 KIO 산하의 지역들과 중국으로 피난하였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들은 미얀마 정부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2011년 미얀마 정부군의 휴전협정 파기 및 무력침탈 재개에 대한 저항의 직접적 계기

  2008년에 미얀마 군사정부는 휴전 협약을 체결한 모든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2008년 헌법에 명시된 바에 따라 미얀마 정부군 직할통제 하의 국경수비대(BGF)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공포했습니다. KIO는 민족간 긴장 및 분쟁의 원인에 대한 제대로 된 정치적 해결 없이는 그들의 독립군조직을 미얀마 정부군 산하 국경수비대로 편제할 수 없다며 이 공포 내용을 이행할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긴장감이 계속된 지 몇 달이 지난 2010년 10월, 미얀마 당국은 카친 주 모닌(Mohnyin) 군구 내 KIA 연락사무소를 급습하여 두 명의 KIA 고위관리를 체포 및 구금하였고, 카친 족은 이를 도발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며칠 후, 1994년 이후로는 처음으로 미얀마 국영 언론들이 KIA를 휴전 중인 무장단체라 칭하지 않고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군이라 규정지었습니다.

  카친족도 2010년 11월로 계획된 총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정부는 카친 족의 정당 등록이나 무소속 입후보 등록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투표용지에서 친 KIO 후보들을 삭제하였습니다. 사실상 KIO 집권 지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카친 족 사람들의 투표권을 박탈한 셈입니다.

  이 총선은 미얀마에서는 20년 만에 처음 있었던 것으로, 2008년의 헌법 총선거 규정을 따랐습니다. 헌법은 전체의석의 25%를 군대에 할당하여 군사정권의 통치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2010년 11월 7일에 치러진 총선은 선전과 달리, 자유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았으며, 전, 현직 군 인사들이 지배하는 정부의 저열하면서도 세련된 시작을 알렸습니다. 신 정부는 2011년 3월에 공식적으로 출범하였습니다.

재개된 무력분쟁: 2011년 6월에서 현재까지

  버마정부는 2011년 6월 9일에 카친 주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함으로써 17년간 지속되어 온 휴전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2011년 6월 8일, KIA는 휴전 협약에 반하여 무장한 채 사전 통보 없이 KIO의 구역에 들어온 세 명의 미얀마 군인들을 구금하였습니다. 다음 날 새벽 3시, 미얀마 정부군 제437대대와  제438대대가 상강(Sang Gang)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소규모 KIA 파견대를 공격하였습니다. KIA 군인 창잉(Chang Ying, 31세)에게 발포하고 그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6월 10일에는 KIA와 미얀마 정부군 북부 사령부가 포로교환 협약을 맺었습니다. 구금되었던 미얀마 군인들은 창 잉과 교환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KIA는 일전에 휴전협정 위반 혐의로 구금해두었던 두 명의 미얀마 정부군 군인을 미얀마 정부군 부대에 넘겨주었으나, 미얀마 정부군은 창 잉의 무기와 소지품들만 돌려주고 창 잉은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6월 11일에야 창 잉의 시신을 KIA에 넘겨준 미얀마 정부군은 그가 전투에서 생긴 상처로 인해 죽었다고 주장했습니다.

  KIA는 창잉의 시신에 고문의 흔적이 있었음을 공개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고문 의혹이 일 수밖에 없는 사진들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와 카친 주 내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 초기 사건 이후 무력충돌은 급격하게 격앙되었습니다. KIA는 적군의 보급로를 막기 위해 몇몇 교량들을 파괴하였고, 또 그들의 구역 주변에 살상용 지뢰를 심으며 방어태세를 갖췄습니다. 미얀마 정부군은 마침내 대공세를 취했습니다. KIA 군부대가 순찰하는 지역에 지뢰를 심고, 그 지역에 몇몇 대대를 추가로 파병하였습니다. 카친 독립군은 미얀마 정부군에게 매복 공격을 가했습니다. 미얀마 정부군은 오랫 동안 카친 독립군이 통치해온 북부 샨 주 지역 내 KIA 근거지 포위를 시도하였습니다.

독립시키기엔 너무 중요한 ‘미얀마의 심장’ – 북부 미얀마의 주요 에너지 인프라 프로젝트들

  카친 주는 수익성 있는 천연자원이 풍부합니다. 미얀마와 중국의 민간 및 국영기업들이 옥, 구리, 철광석, 석탄 및 수목 등 각종 천연자원들에 많은 투자를 하였습니다. 카친 주 내에는 중국측의 대규모 농업자본투자도 유입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많은 북부 미얀마 내 자본 투자 프로젝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건 바로 카친 주 내 분쟁 지역과 샨 주 북부에 입지할 수력발전용 댐들과 추후 설비될 석유-가스(shwe-gas) 이중 파이프라인 등의 에너지 기반시설들입니다.

타핑(Taping) 수력발전 댐 1호

  완전히 작동하는 타핑(Taping) 1호 수력발전 댐과 그 인근에 입지하기로 계획된 제2호 수력발전 댐은 카친  주를 관류하는 타핑 강에 자리잡습니다. 댐 건설은 2007년에 시작되었습니다. 타핑 1호는 2011년 2월에 전력 생산을 시작했지만, 2011년 6월에 미얀마 정부군이 댐 부지 근처의 상 강(Sang Gang)과 붐 센(Bum Sen) 마을의 KIA 점령구역을 공격한 이후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얀마 정부 통제 하의 국영 언론은 미얀마 정부군의 2011년 공격이 해당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수력발전 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KIO는 수력발전용 댐은 단 한 번도 위험에 처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으며, 카친 족은 [카친 족의 사전 동의나 협력 없이 진행되어 온] 일련 댐 건설 프로젝트들의 진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도 밝혔습니다. 2009년 2월, 미얀마 정부군은 댐 근처 구역에 자리 잡은 KIA의 지역 기지들을 파괴했고, KIA는 이를 재빨리 재건하였습니다. 또한 KIO는 에너지운영다국적기업과 미얀마 정부로 하여금 사전에 KIO나 지역 사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KIO의 구역에 댐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뮈잇소네(Myitsone) 수력발전용 댐

  뮈잇소네(Myitsone) 댐은 카친 주 내 3개 강에 걸쳐 설치되도록 설계된 몇 십 억 달러 규모의 7대 수력발전용 댐들 중 가장 큰 규모의 댐으로, 이 프로젝트 때문에 본래 살던 지역에서 쫓겨나 미얀마 정부에 의해 강제이주하게 된 지역 주민들의 댐에 대한 증오와 반대를 한몸에 담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해당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환경 훼손 및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제시되었던 댐 건설 계획안엔 자신들의 자리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아 있었다는 것 때문에 댐 건설 취소를 주장했었습니다.

기만적인 민주화   

<카친 족 전통 복식을 갖춘 아웅 산 수치(Aung san Suu Kyi) 여사>

  아웅 산 수치와 그녀의 전국민주연맹측 인사들이 의석을 얻은 최근의 미얀마 총선거는 서방국가들의 군사정권에 대한 제재 완화 및 지지 재개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이 총 선거는 실권 없는 정부 내의, 그것도 몇 안 되는 의석들이 걸린 선거에 불과했습니다. 미얀마 정부가 반대측과 국제사회에 협조하는 시늉을 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국가들은 군사정권이 국가 전체에 대해 계속 자행해오던 ‘비즈니스’를 이어가도록 용인하고 있습니다.

  최근, 그 ‘비즈니스’에는 미얀마의 최북단의 카친 소수민족 구성원들에게 재차 폭력을 가하는 것도 포함되엇습니다. 2011년 6월 9일, 미얀마 정부군은 지난 50년간 대부분의 카친 주 지역을 통치해온 KIO에 군사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KIO 군대는 카친 족의 최중심지역으로 후퇴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많은 카친 족 마을들이 미얀마 정부군의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와치(Human Rights Watch)가 발행한 83장 분량에 달하는 대형 보고서는 미얀마 정부군이 카친 족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죽이고 고문했으며, 여성들을 강간하고 집들을 불태웠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Human Rights)는 “2011년 6월과 9월 사이에 미얀마 정부군이 민간인들로부터 식량을 약탈하고, 무차별적으로 마을에 발포했으며, [착탄] 공격을 하겠다며 마을들을 위협했고, 민간인을 짐꾼 및 인간 지뢰제거기로 이용했음”을 밝혔습니다. 약 7만 5천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현재 주로 KIO 통치 하에 있는 구역의 난민 수용소 등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카친 족의 하늘은 포격 소리와 타오르는 가옥들의 연기로 얼룩졌습니다. 카친 족의 땅은 부상당한 카친 족 군인들과 난민들로 넘쳐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상찬을 위한 방문도 야기한 미얀마의 소위 ‘정치적 자유로의 변화’에 대한 대화들이 끊임없이 오고 간 와중에도 카친주 내에서 자행되어 온 미얀마 정부의 조직적 폭력은 별 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의 일부는 바로 적합하지 못한 용어 사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자 주: 스탈린도 일찍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고 혁명을 완수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용어를 장악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미디어 매체들이 미얀마 정부가 카친 족 사람들의 대표기구인 KIA/KIO를 ‘반군’, ‘반정부적 무장단체’라 규정짓는 작태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카친 족은 그들의 땅을 뺏고, 그들의 가족을 강간하고 죽이려 하는 미얀마 정부군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위해들에 대해 목숨바쳐 저항하지 않을 이가 세상 천지의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카친 족 사람들은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투쟁해서 얻으려는 “더 나은 조건”은 그저 미얀마 정부군이 1994년의 휴전 협약에서 동의했던 선으로 다시 물러나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50년간, KIA/KIO는 1962년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과 미얀마 정부군으로부터 카친 주 일부 지역을 보호해왔습니다. 미얀마 현 정부는 카친 주의 수익성 높은 광물들과 활엽수림, 잠재적인 수력발전 및 파이프라인 부지들, 그리고 중국과의 자유로운 왕래를 얻어낼 야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계인들의 미얀마 카친 주 내부 사정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용어 사용의 부적실성, 그리고 카친 주에 걸려 있는 근대화 이후 미얀마의 미래와 엄청난 이권이 미얀마 정권으로 하여금 그토록 잔학한 억압 조치들마저도 지속적으로 감수하도록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이제 전 세계의 국제 커뮤니티가 미얀마 카친 주와 카친 족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야만 합니다. 카친 족의 KIA/KIO는 반란군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성공적으로 자치를 실현해 온, 물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독립집단입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미얀마의 정치외교적 성취와 미얀마가 민주화로 나아가는 도정 상에서 처한 위치를 작디 작은 일회성 선거와 전적으로 연결시켜서 이해하는 우를 범해선 아니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 인류애와 보다 나은 국제사회를 실현코자 한다면, 미얀마 군사정권이 즉시 그들의 군대를 카친 족의 관습적 주권이 존재하는 카친 주에서 물러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민간국제지원단체들의 구호와 지원이 절망적인 현실에 처한 난민수용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Insurgencies come and insurgencies go. But ethnic cleansing lasts forever.

국내 반란은 이따금 일어나고, 또 잠잠해집니다, 하지만 민족 청소, 대량학살의 상흔은 영원히 남습니다.

  카친 족이 처한 비극은 명백히 반란 정도에 그치지 않는 후자,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입니다. 그 상흔이 이미 너무도 많이 축적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라는 이름의 상흔이, 언젠가 레이첼 카슨이 생물학적으로 분석했던 DDT처럼 누적되다가, 이번엔 새 소리 대신 인간 양심의 소리가 멎을까봐 두렵습니다. 더 이상은 상흔이 쌓이지 않고, 늦어도 내년 봄엔, 카친 주에도 재가 눈처럼 내리고 불길이 벚꽃처럼 흐드러지는 전화(戰火) 속 ‘침묵의 봄’ 대신,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아름다운 새 소리가 피어나는 진정한 봄이 찾아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기 인턴 강태승 편집 및 작성)

최종수정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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