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2년 2월] #24. 한 줌의 들꽃을 위하여 – 정미나 로스쿨 실무수습생

2022년 2월 3일

 설 연휴가 지나 겨울바람이 차가워질수록 곧 오게 될 봄소식에 가슴이 설레어집니다. 새봄이 돌아오면 화려한 봄꽃들이 무채색의 세상을 봄으로 물들이겠지만, 아직도 제 가슴을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놀이터 옆 풀밭에 비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을 소박한 들꽃들입니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풀밭에 하얀 냉이꽃, 노란 꽃다지가 지천으로 피어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유달리 보라색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이름 모를 보라색 꽃과 함께 하얗고 노란 들꽃들을 고이 모아 꽃다발을 만들어 드리던 추억이 있습니다. 

 엉성한 꽃다발에도 소녀처럼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미소가 좋아 봄이 올 때마다 이어지던 꽃 배달은, 초등학교 때 ‘소나기’라는 소설을 배우면서 갑작스럽게 끝이 났습니다. 소설에서 보라색 꽃은 우울과 죽음을 상징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혹여나 제가 드리던 보라색 꽃다발이 안 좋은 의미가 될까 어린 마음에 지레 겁을 먹은 탓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된 지금은 그런 걱정이 우습고, 귀엽고 또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담아낸 의미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소설들에서 보라색 꽃은 우울과 어두움을 의미할지 몰라도, 어머니와 제가 써나가던 추억담에서 보라색 꽃다발은 딸의 사랑과 행복과 봄을 의미했을 테니까요. 

 

 한 달 동안 어필에서 일하면서 보라색 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난민, 외국인 노동자, 인신매매 피해자분들은 무질서, 혼란, 불법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어필이 걸어가는 공익을 위한 길은 비틀거림과 주저함이 가득한 곳으로 비추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어필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보라색 꽃에 ‘정의와 삶에 대한 희망’이라는 어필만의 새로운 상징과 의미를 담아나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어필에서 난민분들을 위한 소장과 서면을 작성하면서, 변호사는 한 명의 작가와 같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엄정한 법을 적용하기 이전에, 변호사들은 의뢰인들의 진술을 진실에 최대한 가깝게 재구성하고, 법정에서 마치 독자들을 설득하듯이 의뢰인의 이야기를 전달해야 합니다. 특히 난민 사건에서는 언어적 차이와 기억의 한계로 인해 난민분들의 진술은 완벽할 수 없고, 명확한 증거를 수집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힘든 상황일수록 변호사의 난민분들에 대한 진심 어린 경청과 신뢰가 빛을 발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가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처럼, 어필이 써 내려가는 소설에는 어필이 함께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따뜻한 공감이 가득했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짧았지만, 난민분들에 대한 외부의 부정적인 시선과 상징에도 굴하지 않고, 그분들의 곁에 서서 세상을 향해 진실을 담은 책 한 권을 써 내려가는 어필의 노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렇듯 비틀거리면서도 정의를 짓는, 어필이 10여 년간 써내려가고 있는 소설의 한 페이지에 잠시나마 제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또 행복했습니다. 

 아직은 겨울이 다 지나가지 않았으나 머지않아 새봄이 오면, 난민분들의 가슴에도, 어필을 믿고 지켜봐 주시는 후원자님들의 가슴에도, 그리고 언젠가 어필의 진심을 알아줄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도, 어필이 피워내는 소박하고 정겨운 보라색 들꽃들이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로스쿨 실무수습생
정미나 작성)
최종수정일: 202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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