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2년 1월] #23. 기분 좋은 소풍을 끝내며 – 김종철 변호사

2022년 1월 5일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이제 저는 어필 상근 변호사 직을 마치려고 합니다. 2011년 1월 3일 문을 열었으니 정확히 11년 동안 어필에서 일했네요. 설립자가 떠난다고 하니 이유가 궁금하실 것입니다. 시작할 때부터 어필이 지속 가능해지면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더랬는데 감사하게도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이 모든 일은 노안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멀리 있는 간판도 가까이 있는 책도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 종로에서 제일 큰 안과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벌써 노안은 아닐 테고 눈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왔습니다.” “노안 말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의사는 무심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습니다. 웃픈 마음에 찾아간 안경원 주인은 ‘중년안’이라고 굳이 고쳐 불렀지만, 오히려 ‘너의 나이 듦을 부정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더군요. 한창나이에 별소리를 다 한다며 꾸짖는 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그 즈음부터 더 늦기 전에 곱게 그만두고 새로운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실력 있는 동료들이 들어와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고, 조직과 재정이 체계화되고 안정되는 등 어필이 지속 가능해진 덕분이기도 했겠지요. ‘곱게 그만두자’라는 생각은 남자, 연장자, 설립자, 변호사라는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조직 안팎에서 꼰대짓 하는 모습을 들킬까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필에서 일한 11년을 한 줄로 정리하자니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오릅니다. 낯선 곳으로 소풍 가는 기차에서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떨다가, “벌써 도착했어?”라며 짐을 챙겨 허둥지둥 내리는 모습. 막상 내려보니 처음에 상상했던 풍경과 얼추 닮았지만 어딘가 생경한 장소입니다. 기분 좋은 생경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처음 가졌던 상상력이 빈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기차 안에서 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변한 이유는 물론 그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이지요. 
 
 저를 변화시킨 그 이야기란 무엇보다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했지만 용기 있게 어려움을 극복한 의뢰인들의 미시적인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 이야기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 조금 큰 이야기, 즉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 그리고 다국적 기업의 인권침해에 대한 제한 없는 관용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우리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거시적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필에서 일하면서 저는 이렇게 다른 층위의 여러 이야기들을 퍼즐 맞추듯 연결하면서 성장해왔습니다. 
 
 결국 어필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후원자 여러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난민임에도 불구하고 강제추방 당할 위기에서 극적으로 풀려난 아들과 재회한 노모가 수화기 너머로 펑펑 울며 말했습니다. “이런 기적을 선물로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역시 숨죽여 같이 울었습니다. 저는 노모의 인사를 어필의 후원자 여러분께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기적을 선물로 주셔서 고맙습니다.” 
 
 국적을 포함해 모든 것을 스스로 이뤘다고 여기는 능력주의 사회(혹은 공정하다고 착각하는 사회)에서, 여러분의 아낌없는 후원은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은 기적처럼 주어진 것이고 선물로 받은 것임을 늘 일깨워주셨습니다. 11년 동안 저는 후원자 여러분이 주신 선물에 감동해 다시 취약한 이주민과 외국인들에게 전달하며 기쁨을 누렸습니다. 
 
 어필을 떠나 어떤 새로운 실험을 계획하는지 궁금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저도 아직 모릅니다. 앞으로 하나씩 찾아가야 하는 형국이지만 걱정과 염려보다는 기대와 흥분이 더 큽니다. GPS 없이 길을 더듬어가며 만날 새로운 풍경을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어필에서처럼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무슨 일을 하든 아름다운 공간과 공동체,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가겠습니다. 
 
 그동안 동료들과 함께 일궈 낸 크고 작은 성과들이 많지만, 가장 큰 열매는 어필이 앞으로 펼칠 활약이 더 기대되는 건강한 단체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후회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만 여기서 다 나열하지는 않으렵니다. 단지 모든 일을 사랑으로(ex amore) 하지 못하고, 때로는 두려움이나 분노로 했던 것이 제일 후회가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래 U2의 노랫말처럼 결국 제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한 일들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어필의 동료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습니다. 하지만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렵니다. 앞으로도 동료들의 좋은 친구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응원하고 후원하고 돕는 일을 계속할 테니까요. 그러니 여러분도 계속 어필의 충실한 후원자요 지지자로 곁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And love is not the easy thing 
 The only baggage you can bring 
 (Love) Is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All that you fashion – all that you make 
 All that you build – all that you break 
 All that you measure – all that you feel 
 All this you can leave behind 
 
 <U2-Walk On> 
 

 2021년 1월 5일 김종철 올림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 김종철 작성)

최종수정일: 202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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