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1년 11월] #22. 곳곳의 다정 – 양은성 펠로우 변호사(미국변호사)

2021년 12월 1일


어릴 때 이사가 잦아 다섯개의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번은 참 많이 울었어요.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모르는 도시로 가는 것도 얼마나 서러웠던지. 하지만 일부러 기억해내려 하지 않으면 그 때의 눈물은 사실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낯선 교실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던 제게 손을 내밀어준 친구들이 있어서, 서러운 헤어짐보다는 설레는 새로운 만남이 더 선연한 흔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순간들이 제게는 보물같은 추억이라 저도 어느 순간부터 새로 전학오는 친구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정한 그들의 영향입니다.


12월 원고를 구상하다 문득 어필에서의 일도 이와 조금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낯선 사람. 원하지 않았던 삶의 변화. 제가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는 아픈 세상을 살아남은 이들을 한국에서 맞이하고, 그 이야기 한줄 한줄 사이에 스며있는 감정에 귀기울여 봅니다. 서러움, 절박함, 두려움. 안도감, 감사함, 기대함. 그리고 살그머니 손을 내밀어봅니다. 이 계절이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색으로 기억되기를.


물론 초등학교 때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손 내밀어 함께 신나게 뛰놀고 나면 어색함마저 도망가버리던 그 시절과 달리, 지금 하는 일은 장애물 경주입니다. 어떤 장애물은 뛰어넘고, 어떤 장애물은 치우고, 어떤 장애물은 상처가 날만큼 힘껏 부딪혀야 하는. 낯선 곳에 불시착하게된 누군가가 홀로 뛸 수는 없는 고난이도의 코스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들만 계속 듣다 보면 세상이 너무 어두워보이지 않니? 너무 우울할 것 같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둠만 마주하고 있으면 정신이 남아나기가 어렵겠지요. 세상에는 너무 많은 형태의 아픔과 슬픔이 있고, 이를 치유하고 예방하기 위해 당연히 바뀌어야 하는데도 기묘할 정도로 꿈쩍않는 법이나 제도도 많고, 설상가상으로 타인을 더 잘 착취하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어둠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서 또 슬며시 손을 내밀게 됩니다. 한 사람이 손을 내밀 때 같이 손을 내미는 다정한 이들이 곳곳에 포진해있고 그 다정함이 놀라운 변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아픔도 많지만, 아픔에 맞서고자 하는 좋은 사람들도, 아픔을 딛고 일어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희망을 전하는 강한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많은 다정한 이들이 곳곳을 살피고, 크고 작은 다정과 용기가 누군가에게 닿아, 서로 닮아가고 퍼져가는 모습을 보면 어린시절의 설렘이 다시 살포시 고개를 듭니다. 느릿느릿, 비틀거리면서도 정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은, 함께 비틀거리고 서로 일으켜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또 함께 손을 내밀어 봅니다. 언젠가는 장애물 경주가 아닌, 그저 손을 뻗기만 하면 우리 모두 신나게 뛰놀게될 세상을 기대하며.


***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김에 얼마 전에 발견해 주섬주섬 담아두었던 새로운 보물도 한조각 드려봅니다. 모두들 따스한 연말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막 도착한 이 세계에 결코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존재다. 이방인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지나치게 미적이고 시적이고 낭만적이라서 문제. 나는 반투명한 이물질이다. 바깥에 나가면, 무심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학교와 직장을 오가며 관공서와 은행을 들락거리거나 장을 보고 커피를 마시는 내국인들. 세계 바깥으로 내던져진 듯 보이지만 한 국가어의 영역에 안전하게 속해 있는 유색인 청소년들, 걸인들, 노숙인들. 나는 세계의 바깥은 물론 언어의 바깥에 있었다. 타국의 거리를 걷다가 부지불식간에 쇼윈도 판유리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경험인지. 몇 컷의 연속적 셀룰로이드 이미지 한가운데, 나는, 잘못 만든 이국풍 소품처럼 찍혀 있다. <나의 선택>은 내가 도저히 침투할 수 없을 듯한, 빗방울처럼 웅크리고 표면에 묻어 있을 뿐인, 이 타인들의 견고한 공동의 생의 블록을 미세하게 파열시키고 그러한 파열 자체를 괴로우면서도 즐거이 살아가는 또 다른 타인들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깨진 사람들, 깨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그들 덕분에 이국 사회의 틈새와 주름이 조금씩 엿보이기 시작했다. 들여다보고 싶은 갈피와 숨 쉴 만한 통풍구가 생겨났다.
– 윤경희 <분더카머>, ‘그의 손짓을 알아듣다’ (65-66쪽)

 

(공익법센터 어필 펠로우변호사(미국변호사) 양은성 작성)

최종수정일: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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