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충격. 충격
충격. 충격. 충격이었다. 나는 프랑스 칼레의 난민 캠프 안에 180분 동안 숨도 쉬지 못한채 앉아있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난민들을 직접 만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는 그 수가 너무 적어 만나기는 커녕 주변에서 지나치기도 어렵다. 법제도가 유럽의 일부국가와 달라 소위 난민캠프 또는 집적된 숙소군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당신이 전철에서 지나친 외국인이 기나긴 난민심사 속 지쳐있는 난민일 수도 있지만, 옆의 친구, 동료, 이웃으로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가끔 언론 속에서 등장하는 뉴스들 속에 난민은 ‘저 멀리 지중해 어딘가의 무리들’로 멀리 여겨지거나, 인종주의적 수사로 ‘개별적인 이름도 얼굴도 없는 난민이라는 인종’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난민이라는 무거운 덩어리.
난민들을 만나고, 구하고, 때론 성공하지만 많이 실패하는 엉성한 삶을 살아가는 활동가로서의 나는 아무래도 활동의 일환으로 계속해서 어떤 컨텐츠들을 한국의 사람들에게 ‘소개하려’ 애쓴다. ‘난민들은 이런 사람들이라ㄹ고’, ‘이런 고통을 겪었고’, ‘그러나 피해자가 아니라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동시에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매력적으로 순치시키는 방법도 찾고, 고통의 크기를 보여주는 방법도 찾고 그런 고민 속에 ‘연대’를 위한 공감을 어떻게 쌓아나갈 것인가는 주된 숙제다.
2026년 3월 19일 연희예술극장에서 극단 ETS의 ‘The Jungle’을 만나게 된 것은, 난민을, 난민캠프의 삶을 소개한 멋진 연극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정확히 거기까지만 듣고, 2026년의 첫회 공연을 예매하고, 찾아갔다. 전날 긴 조사에 동석하고, 다 언급할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 속 한 난민을 갇힌 곳에서 풀어내려 뛰어다니다가 지쳐있던 차였다. 어떤 연극일까. 연희극장의 전시 공간에서 맞닥뜨린 전시물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떠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위기의 시작이 아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사람들이다’와 같은 문구들을 보고 반가웠던 마음 속 자리에 앉았고, 나는 180분 동안 18명의 난민들과 1년을 보냈다.
연희극장에서 나는 18명의 프랑스 칼레 난민들의 옆에서 1년을 보냈다
조 머피와 조 로버트슨 작가가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자 도버 해협 건너편 영국 바로직전에 있는 도시인 칼레의 난민캠프가 철거되기 전까지 2015년 칼레 캠프 한복판에 임시 극장을 세우고 난민들과 생활하면서 구상하고 만든 이 연극은 그만큼 밀도가 높다. 2017년 런던에서 초연을 했고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머시브(Immersive) 경험 속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칼레 난민 캠프의 아프가니스탄 난민 ‘살라’의 식당이 무대다. 통상적인 연극무대와 달리 가깝게 배치된 구조 속 관객은 배우들과 1m도 안되는 자리에서 숨소리, 땀, 흔들리는 눈빛을 본다. 시청자로서의 통제권 즉, 10초 건너뛰기를 마우스 클릭으로 할 수 없는 장소에서 지켜보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2021년에 이어 다시 이 극을 올리는 극단 ETS의 인스타그램에는 각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의 인터뷰가 친절하게 담겨있으니 꼭 보길 바란다).
이 연극의 엄청난 장점이자 매력은 난민들의 이야기를 살아있게 다룬다는 것이다. 수단, 시리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에리트리아, 가자, 쿠르디스탄, 이라크, 이란의 곤경에서 탈출한 난민들의 이야기다. 폴라, 샘, 아말, 노룰라, 오마르, 오콧, 박서, 야신, 마즈, 이야기 속 그들은 그들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같다. 그리고 그들은 멋지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다.
그들은 다르다. 왜 다른가?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을 겪었다.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재자로서 주요인물인 35살의 사피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시리아의 내전을 피해 탈출했다. 수단에서 다르푸르 학살을 피해 온 17살 오콧은 아동이고, 아프리카 육로의 이주 경험 속 세 번이나 죽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32살의 살라는 고향을 세번 잃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모를 잃고 수천km를 넘어 온 15살 아프간 소년 노를라와 함께 식당을 운영한다. 에리트리아에 서 온 여성 타냐와 헬렌의 탈출 속 배경은 우리들의 안온한 일상과 전혀 다른 경험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지중해 난민선의 경험은 마치 우리가 가라앉는 배 속에 같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수단 다르푸르에서 아랍계 잔자위드 민병대와 아프리카계 민병대 사이의 무력충돌로 잔자위드가 흑인 부족을 대량 학살, 성폭행, 고문하여 수십만명이 사망하고, 수백만명이 난민이 되었다. 들어 보았는가? 수천km를 걸으면서 탈출하고 납치당하고, 몸값을 요구당하는 오콧의 경험? 이런 경험을 겪은 그들은 다르다.
그들은 같다. 왜 같은가? ‘난민이란 인종적 덩어리’가 아닌 그들은 똑같은 사람이다. ‘안전’을 찾고, ‘집’을 찾는다. 머물곳, 몸을 뉘일 곳, 안전이 보장되는 공간 우리들과 같다. ‘미래’를 꿈꾼다. 지옥을 탈출해 도착한 칼레의 진흙탕 속에서 당연히 탈출을 통해 미래를 꿈꾼다. 버려야만 했던 고향이지만 자신들의 나라와 문화에 자긍심을 갖는다. 믿을 만한 서로의 친구가 되고 싶고. 때로는 불신하고, 작은 일에도 당연하게 상처받는다. 함께 공동체적인 기쁜 소식에 희열을 느끼고, 서로 축하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들은 멋지다. 낭만화되지 않은 난민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멋지다. 일상적이지 않은 삶의 경험이 가져왔던 ‘단단함’은 각 배역들의 이야기 속 사람들의 비범함을 일깨운다. 고통의 경험만이라면 괴로운 이야기에 그치겠지만 극복을 위한 싸움의 서사는 ‘모두들 각자의 싸움을 싸워나가는’ 우리네 사람들에게 도전과 존경의 마음을 준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연결하고 이해해가는 것, 노룰라와 오콧의 화해는 ‘단자화’되고 공동체적 화해의 경험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경탄을 준다. 캠프의 철거에 맞서서 서로 토의하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도출하고, 서로를 위해 연대하는 모습은, 부당한 공권력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경찰에 맞서서 투쟁하는 모습은 잊고 있었던 무엇을 일깨우고 존경심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우리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난민들을 달랐고, 같았고, 멋졌지만, 한계도 있다. 불신하고, 싸우고 다툰다. 어느새 그들의 이야기 속 18명 난민들의 서사 속 우리는 난민과 우리가 사실 맞닿아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도 그들이었고, 그들도 우리다. 난민은 난민이란 단어로 외피가 둘러진 덩어리가 아니고, 사람이고, 바로 나다.
두 번째의 매력적인 부분은 난민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난민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겼다는 것이다. ‘난민들을 도우러오고 영어 학교를 운영하는’인 18세 자원봉사자 베스, 한 걸음 떨어진 영국인 자원봉사자들의 리더인 데릭, 아동 NGO를 운영하는 폴라, 건설전문가지만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와 떨어져 여기서 희망을 찾는 박서, 그리고 18세의 아동으로서 낭만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냐고 비판을 받으면서도 해결책을 찾기 위해 애쓰는 샘. 난민 캠프에 있지만 한 걸음 뒤에서, 어떨때는 자선으로 어떨때는 권리로 난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도움도 제공하지만 부족한 모습에 비판도 받게 되는 이들의 모습에서 한국에서 활동하며 또다른 경계선에 서있는 내 모습을 본다. 쿠르디스탄의 이야기와 페쉬메르가의 이야기를 엮으며 밀입국 업자로 활동하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알리, 프랑스 CRS의 앙리, 그리고 공권력을 상징하는 검정색 옷의 이름 없는 보초도 나온다. 공권력의 모습은 한없이 무섭고 폭력적이며, 현실 속에서 칼레의 캠프를 점차 조금씩 잠식해온다. CRS의 모습은 ‘난민들에게 무관심’하여 그들을 내버려두는 대중의 모습이기도 하고, 이를 빌미로 난민들을 추방하고, 유인 팩터를 없애서 어떻게든 국경을 건너지 못하게 하려는 우익화 되고 있는 정부들의 모습도 담긴다.
이러한 매력 속, 이 연극은 정답을 말하거나 교조적이지 않아 멋지다. 통상적으로 난민과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할때면 이를 듣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그들의 고통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때는 ‘내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알려주려 하지?’, ‘왜 이렇게 가르치려고 하지? 나도 생각할 수 있는데’라는 반감이 들때가 있기 때문이다. 난민들과 연대하자는 이야기들은 어느새 ‘이상적인 인권단체와 활동가들의 낭만적인 이야기’, ‘세상의 엄정한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의 이야기로 들려서 배제되기도 한다. 낯설다는 벽을 넘어 난민의 이야기를 연대의 정신까지 활동까지 이어가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그런데, The jungle은 그렇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경과 다양한 다이나믹을 그리고, 보여주고 옆에 같이 있게 한다.
배역과 극의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기도 하다. 난민 배경의 배우들이 나오기 어려운 한국의 맥락상(어필의 친구 조나단 한번 출동해도 될텐데!)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이나믹을 오로지 배역과 의상만으로 연기해야하는 동아시아 한국의 맥락적 어려움이 있음에도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열연으로 우리들을 이야기 속에 밀어넣는다. 연극의 매력이란 바로 다른 페르소나를 그대로 펼쳐서 보여주는 배우들의 영혼 떄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난민들과 함께한 180분들 속 우리는 그냥 이해하게 되고, 같이 공감하게 되고, 같이 울게 된다. 객석의 많은 사람들이 어느새 울고 있었고, 어느새 난민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배우들과 어필이 함께 만나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칼레인가, 왜 영국이 굿챈스인가
중동지역, 또 아프리카 지역에서 망가진 삶과 상실된 미래, 전쟁, 살인과 고문 없는 삶을 찾아 탈출하는 난민들이 난민제도가 어느정도 완비된 유럽으로 가는 경로는 크게 세 군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튀르키예 경로(Turkey Route)다. 아프리카 동북부(소말리아, 에리트레아 등)에서 시작하여 튀르키예를 거쳐 그리스, 발칸반도를 통해 북상하는 경로다. 둘째는, 리비아 경로(Libya Route)다. 서아프리카(나이지리아 등) 및 중부 아프리카에서 리비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건너가는 경로인데, 셋 중 가장 위험한 경로다. 수많은 사막을 건너고, 인신매매를 당하며, 사람들이 실종된다. 마지막이 모로코 경로(Morocco Route), 모로코를 통해 스페인으로 진입하는 경로다.
칼레는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으로 진입하기 직전의 도시다. 수단, 에리트레아,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프랑스어 보다는 영어가 조금 더 익숙하고, 난민들의 가족, 같은 국적 커뮤니티들은 더 많은 지지 기반이 있는 영국이 더 익숙했다. 난민제도가 프랑스 보다 혁신적으로 좋다고 하긴 어렵지만, 노동시장이 더 활성화되어 있고 난민들을 더 환영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이해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난민신청을 하면 더블린 협정의 ‘최초입국국가’로 난민심사 이루어지기에, 이송이 되기에 유럽으로 들어온 난민들은 대부분 그리스, 이탈리아로 송환된다. 지중해를 넘어 처음으로 밟은 국가가 그렇기 떄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실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옥 같은’ 현실을 뚫고온 이들이 더 이상향으로서의 ‘에덴’을 꿈꾸고 미래 어딘가에 있는 곳을 찾아가려는 것, 그게 실제로 낙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가? 이래서 도버 해협을 건너기 위해 ‘트라이’하고, ‘잡히면 다시 추방되고’, 미래를 위해 싸운다. 굿챈스가 있다고 믿고, 희망을 가지고.
The JUNGLE이 던지는 질문 – 한국이란 JUNGLE에서 어떻게 연대하는가?
‘여러번 죽고’, ‘경계에 끼여 있고’, ‘사람이 아닌 것처럼 취급’받는 난민들. 이미 국적국을 목숨을 걸고 탈출해 ‘프랑스 칼레’에 도착했지만 이곳은 이상향이 아니라 ‘JUNGLE’이다. 아직도 안전과 미래를 아무도 찾지 못했다. 서로가 연대의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곳, 매일 8000명이 이곳에 도착한다는 이야기 속 ‘곁에 있는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짐’으로 느껴질 수 있는 곳. CRS가 조여오고, 서로가 서로를 조여오는 탈출해야 하는 정글.
칼레의 난민캠프 정글은 동시에 한국에도 펼쳐져 있다. 매년 18,000여명이 난민신청을 하지만(한국의 맥락속 ‘망명신청’보다는 난민신청이라는 용어가 더욱 정확하다. Asylum을 번역한 더 정확한 단어는 비호이고, 망명은 1970년대 이후의 외교적인 고위급 인사의 망명을 떠올리게 하기에 일상적인 제도 속의 난민들과 다른 무엇으로 만든다) 인정율은 1%정도도 이르지 못하는 한국. 해외의 난민인정율 통계 30%와 비교해보면, 매년 난민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5000명 이상 난민지위를 얻지 못하고, ‘기다리고’, ‘멸시당하고’, ‘CRS와 같은 출입국 사무소에 단속되고’, 굿챈스를 한국에서 찾지 못하고, ‘추방되고’, ‘실종되고’, ‘자살로 내몰리는 곳’. 전쟁터에서 떨어져 왔어도 추방되고 구금되며, 공무원들에게 비웃음 당하고, 사람취급받지 못하는 곳, 생이별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데려올수도 나갈수도 없는 곳. 백인들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그렇지 않은 경우에 돌아오는 차별적인 대우, 매년 5000여명의 정당한 난민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난민들은 그렇게 ‘난민제도를 남용하는 경제적 이주민’으로 여겨져 스러져 간다. 사피, 오콧, 살라, 폴라, 샘, 아말, 노룰라, 오마르, 오콧, 박서, 야신, 마즈는 매일, 매년 한국에서 그렇게 스러져 간다.
전날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 속 억울하게 갇히게 되었던 한 난민의 이야기 속 무거운 짐을 연극을 보러 걸어와 이야기들 속에 빠져든 어느덧, 중간 인터미션 시간에 그 난민에게 연락이 걸려왔다. ‘석방되었다고’. 눈물이 났다. 정글의 이야기 속에서 눈물이 났고, 그런 난민들의 이야기가 한국에도 똑같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옆에서 애를 쓰고 노력해도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많다는 자괴감에. 그리고 그렇지만 이렇게 고귀하게 사람들을 살리고 함께 미래를 꿈꾸게 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감사에.
연극 내내 모든 난민들의 이야기에 실제로 한국에서 만났던 난민 친구들의 이야기가 겹쳤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향을 그리면서 알레포를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사피에게서 최근 10여년의 내전을 마치고 고향 라까로 돌아간 친구의 얼굴이, 고문당한 흔적을 보여준 오콧의 모습에 고문 속 잘린 손가락을 보여줬던 친구의 얼굴이. 실종되었던 난민들의 이야기 소식에 더 이상 실패해서 방법을 찾지 못해 어디론가 연락이 닿지 않은 친구들의 얼굴이. 존엄함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던 살라의 모습에 카불에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전했더 친구의 얼굴이. 가자에서, 이란에서, 쿠르디스탄에서...
ETS 극단의 두번째 상영, The Jungle을 볼 수 있는 시간, 프랑스 칼레의 철거된 난민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2026. 3. 19.(목)부터 4. 5.(일)까지다. 하루에 한번.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9:30-22:30. 토요일과 일요일은 15:00-18:00.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익법센터 어필 이일 변호사 작성)
관련 활동분야
관련 글
- 2026년 3월 19일
- 2026년 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