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 리뷰 : 고요한 사회를 넘어서

2026년 2월 27일

0.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

“다 너를 위해서 한 행동이야”,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런 말을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를 위해서”라는 의도에 과연 상대방의 의중은 충분히 고려되고 있을까요?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작중 인물인 영국(윤주상), 판례(양희경), 용수(박종환), 영란(카작)은 모두 알고 보면 자기보다는 주로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인정 없어 보이는 영국은 과거를 반성하며 용수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홀로 용수를 키운 판례는 늘 자식의 행복을 우선합니다. 용수는 사망 보험금을 통해 모두의 구원을 꿈꾸고, 영란은 실종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판례를 지키며 늘 곁에서 보듬습니다. 모두 남을 위해서 이 한 몸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름답게만 보이던 이 배려들은 실타래처럼 얽히며 서사 안에서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선의로 움직인 인물들의 선택이 누적될수록 결과는 행복과 멀어지고, 오히려 개입하지 않았을 때가 더 나은 가능성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용수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한 가족을 사실상 해체시키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선의와 파국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1. 알잘딱깔센의 향연 그리고 파국

<영국과 용수가 같이 걸어가는 모습>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은 상대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의도를 파악해 적절히 행동해주길 바라는 기대를 압축한 표현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 역시 이러한 기대를 서로에게 투사합니다. 용수와 영국은 판례와 영란이 진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행동해주길 원합니다. 판례는 남겨진 영란이 용수를 잊지 않은 채 자신처럼 계속해서 기다리길 기대하고, 영란은 판례가 자신과 함께 베트남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주길 바랍니다.

<판례와 영란이 같이 걸어가는 모습>

그러나 이처럼 암묵적 기대에 기반한 ‘알잘딱깔센’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습니다. 작중 파국의 절정에서 영국의 의도에 따라 용수의 실종사망확인신고서를 작성한 영란의 행동은 판례가 가족처럼 여겼던 영란이 자신의 신뢰를 배반한 행위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에 분노한 판례의 반응은 다시 영란에게 깊은 실망을 안깁니다. 영란은 자신의 선택이 금전적 이유가 아닌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알아주지 못 한 판례에게 실망해 짐을 챙겨 집을 나갑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요구한 ‘알아서 이해해주길 바라는 태도’가 얼마나 취약한 전제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작 중의 파국은 명확히 말해지지 않은 기대를 읽어야 하는 상황이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이 아닐까요?

한편 이는 비단 ‘아침바다 갈매기는’에서만 발생하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영화에서처럼 선의에 기반한 암묵적 기대는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국룰(國民+Rule)”이라고 표현되는 암묵적인 규범 혹은 집단적 기대가 작동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보다 정해진 길을 따라갈 것을 은연중 요구합니다. 물론 이러한 기제가 무조건 나쁜 것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효율적입니다. 다만 이것이 지나치게 강할 경우 사람들은 종종 의문이나 불편함을 느껴도 묵묵히 참기만 할 뿐입니다. 질문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습관을 내면화하게 되고 집단의 기대에 맞춰 행동하지 않거나, 않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우리 집단의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이러한 규범적 압력은 외형적으로는 질서와 안정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개인의 선택권과 자기표현이 점차 잠식당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통제 구조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민들과 싸우는 형락(빨간색 바람막이)의 모습>

영화 속 형락(박원상)은 이러한 구조가 잘 드러나는 인물입니다. 형락은 용수의 실종 사건 이후 영국의 새로운 선원으로 합류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습니다. 영화에서는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형락과 마을 사람들 사이의 싸움 장면을 통해 그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때 형락은 마을을 변화시키고자 어촌계를 조직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공론화한 그의 행동은 주민들이 기대하는 암묵적 규범과 집단적 조화에 부합하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에게 거부감을 유발했습니다. 그 결과 형락은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해 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실패 이후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주민들은 여전히 그에게 낯설고 불편한 시선을 보냅니다. 한편 영란은 판례와의 갈등 장면에서 자신이 ‘눈치가 없고’, ‘어설프며’, 한국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서러움을 토로합니다. 이는 개인적 서운함의 감정에 더해 집단이 요구하는 암묵적 기대와 규범에 부응하지 못한 존재가 경험하는 구조적 배제의 감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잘딱깔센?

<“갔지 그럼”이라 대답한 후 판례의 모습>

영화는 영란이 집을 나간 이후의 서사를 의도적으로 비워둡니다. 영국에게 따지러 온 판례에게 영국은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그날 밤 용수와 영란은 각자의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갔냐?”라는 영국의 물음에 “갔지 그럼”라고 답하는 판례, 이어지는 “됐네 그럼”이라는 영국의 말과 함께 출항하는 어선의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됐지 그럼”이라 대답한 후 영국의 모습>

진실이 드러난 순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영화는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충분히 발생할 법한 논쟁이나 갈등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판례가 영란에게 전화를 걸어 떠날 준비를 돕고, 영국이 술집에서 의도적으로 싸움을 걸어 경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일종의 ‘처리자’ 역할을 하는 장면만 중간에 보여줍니다.

박이웅 감독은 ‘아침바다 갈매기’의 제작 배경으로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에 대한 관심을 밝히며, “왜 떠나는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영화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떠나는 자’는 용수와 영란이며, ‘남겨진 자’는 영국과 판례입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용수는 시골 어촌 생활에 지쳐서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가족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영란은 융화되지 못한 타인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과연 희망을 찾아 떠난 그곳, 베트남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용수는 처지가 바뀌어 베트남에서 타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용수에게 현지의 언어와 문화, 규범이라는 또 다른 ‘알잘딱깔센’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영란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 희망적인 미래가 그려질 수는 있겠으나 고향에서 가족이 강에서 낚시를 해 하루 생계를 유지한다는 묘사를 고려하면 영란이 지금의 용수와 같은 현실에 놓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한국에 남은 영국과 판례는 어떨까요? 용수와 영란을 떠나보낸 뒤 판례는 다시 왁자지껄 웃으며 마을회관에서 고스톱을 치고 영국은 뱃일을 하러 떠납니다. 이들은 기존의 규범 속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안정은 곧 상실을 내포한 안정입니다.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영국과 판례가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망망대해를 향해 출항하는 배 한척과 날아가는 갈매기 한마리(영화 마지막 장면)>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강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동튼 이른 아침,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위태로운 작은 배와 힘겹게 날아가는 갈매기 한 마리. 바다 저편에는 육지가 있을 수도 있고, 끝없는 수평선만이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혹은 험한 바다 멀리 건너 저편에는 이상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처럼 영화가 암시하는 인물들의 미래는 결코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결말을 환상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불안정한 작은 배의 이미지로 모든 것을 마무리합니다. 어쩌면 서울로 떠났다가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형락의 이야기가 가장 현실적인 미래의 한 단면일지도 모릅니다.

<고향에 돌아온 후 실의에 빠져 생활하는 형락의 모습>

3. 떠남과 남음이라는 고요한 순환이 과연 최선?

<아침바다 갈매기는 영문 포스터>

영화 속에서 용수와 영국이 일으킨 소동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규모가 작지 않습니다(최소 보험사기특별법위반죄, 밀항단속법위반죄, 위계공무집행방해죄의 경합범으로 처벌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소동의 성격은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라기보다 현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탈출에 가깝습니다. 행위의 양태는 거대하지만 그 목적은 지극히 소극적입니다. 한편 판례와 영란은 ‘유족’이라는 지위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더욱 제한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들은 사건의 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거나 상황을 뒤흔들기보다 상처를 감내하며 어떻게든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역할에 머뭅니다. 즉, 등장인물 모두 큰 틀에서 소극적인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영문 제목은 ‘The Land of Morning Calm’입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고요하다”는 곧 “정적(靜寂)”임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에 반대되는 것은 “동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다시 영화의 주된 이미지인 ‘바다’로 돌아가서 ‘고요한’ 바다는 무엇일까요? 일견 평온하고 안정된 바다로 보이나 ‘고요함’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정체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물이 움직이지 않을 때, 바닷속 생명의 순환은 멈추고 그 속에는 소멸의 기운이 도사립니다. 즉, ‘고요한’ 바다는 안정, 규칙 그리고 질서같은 평화가 아니라 그 속에는 생명이 숨 쉬지 못하고 있는 내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박우영 감독의 문제 의식, “왜 (주로 젊은 사람들은) 떠나는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은 결국 “정적(靜寂)”인 “고요함”에 있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골에 실망하여 떠났던 형락, 공동체에 편입되지 못하여 괴로움을 겪는 영란, 시골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여 소동을 일으킨 용수, 일견 평화로워 보이나 이들이 떠나면서 소멸의 위태로움에 직면한 영국과 판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영화 속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4. 고요한 사회를 넘어 순환이 있는 사회로

<2026 ACLED 연구소 세계 분쟁 현황 감시 사항 일람표 중 분쟁 지역 현황>

ACLED 연구소의 2026 세계 분쟁 현황 지도를 들여다보면, 오늘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국가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비교적 “고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계의 분쟁과 위기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밀려납니다. 자연재해와 기후위기, 정치적 박해, 대형 사고와 같은 문제들 역시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남의 일’ 혹은 논외의 영역으로 취급되기 쉽습니다.

<세계에서 발생한 위기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사>

설령 그러한 사건들이 잠시 우리의 관심을 끌더라도 관심의 초점은 대체로 제한적입니다. 우리가 주시하는 것은 우리의 바다가 여전히 “고요한지” 그 혼란이 우리 삶이 속해 있다고 믿는 안정된 영역 안으로 침투하지 않았는지 여부입니다. 즉, 우리의 주의를 끄는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발생한 위기 자체보다도 그 위기가 저쪽에 있는 우리 사람들에게 닿았는지 여부입니다. 그 고요함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안도합니다. 그러나 저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저편의 사람들은 분쟁과 재난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생존을 위해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흩어지고, 이동하며, 때로는 한국으로 향합니다. 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선택에 가깝습니다,

<난민 뉴스 댓글 반응 모음 : https://www.youtube.com/watch?v=QcFOYRJMQEE>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너 인생을 보호할 권리보다 자국민의 인생을 보호할 권리가 더 크다”, “지 혼자 살겠다고 나라 떠난 사람들” 등 대부분은 우리가 어렵게 유지해온 “고요함”을 흔드는 파동으로 인식하고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불안과 공포는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합니다. 이질적인 타자가 유입된다는 사실은 불안을 야기할 수 있고, 우리가 공들여 쌓아온 규범과 질서를 흔들 수 있으며, 과연 그들이 우리 사회에 동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고요함’에는 그 자체에는 큰 의문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순환되지 않는 사회가 안전할 수는 있으나 그 안전함이 과연 행복이 될 수 있을까요? ‘아침바다 갈매기는’에서 용수는 일견 가정이 있고, 자신의 집이 있고, 직업이 있습니다. 세계적 기준으로 본다면 실패한 삶이라기보다는 나름 성공한 축에 속한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왜 용수는 이 환경에 지쳐서 떠날까요? 꿈도 희망도 없다고 느낀 개인적인 허무나 좌절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근원은 결국 “고요함”에서 비롯된, 작은 변화를 시도하려 해도 할 수 없다는 정체된 환경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보입니다. 그뿐일까요? 물질적 삶의 질 측면에서 영란도 본국인 베트남에 비해서는 양질의 환경에 놓여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영란의 가슴 한 켠에는 늘 고국에 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타향살이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보편적이나 영란의 그것을 결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속에 편입될 수 없다는 절망, 끝내 내부자가 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또 다른 ‘용수’가, 또 다른 ‘영란’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요함’을 지키는 데에만 몰두한 사회는 결국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되물으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로스쿨 실무수습생 서성오 작성)

최종수정일: 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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