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것들을 깨뜨려(破前) 얻어진 마술같은 시간 (Magic Time)

2011년 12월 26일

지난 12월 23일 4시, 어필 식구들은 프로젝트 극단 파전(破前)의 공연 ‘매직타임’을 관람하기 위하여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을 찾았습니다. 파전은 기존의 예술이 담아내지 못했던, 그리고 이른바 ‘장애인 예술’ 역시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던 예술양식과 관람방식에 대한 고민을 기초로 탄생한 프로젝트 극단입니다. 스텝과 배우를 포함 약 20명이 활동하며, 서울대학교 총연극회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그 밖의 학교, 각기 다른 전공,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배우 또는 장애를 갖지 않은 배우가 모두 참여하는 연극 
 
극단 파전은 공연을 통해 장애가 있는 몸에 부여되었던 기존의 통념들을 부수고, 장애 유무를 떠나 각자의 배우들이 미적인 성취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장애인 예술의 새로운 단계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임스 셔먼의 원작을 1998년 장진 감독이 각색, 연출한 작품인 ‘매직타임’은 파전의 의도를 표현하기에 절묘한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직타임’은 셰익스피어의 극 ‘햄릿’의 마지막 공연을 앞둔 배우들의 무대 뒤 평범한 일상을 다룬 액자 형식의 작품으로, 장진의 ‘매직타임’은 정극과 마당극 버젼의 햄릿을 동시에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날 공연에서 우리는 장애를 가진 배우들을 만났지만, 놀랍게도(혹은 당연하게도) 그 장애 여부보다는 그저 각자 배우들이 맡은 역할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전동휠체어를 타고 유유히 움직이며 오필리어를 연기하는 배우는 휠체어의 동선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슬픔에 잠긴 유약한 오필리어의 성정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장애라는 기존의 틀을 벗겨낸 무대를 보며 관객들이 이러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극단 파전의 극은 완성되는 것이겠죠.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연극
 
한편, 극단 파전의 공연은 극 외적으로도 새로운 실험을 담고 있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열려있고 접근 가능한 관람 문화를 만드려고 한 점이 그것입니다. 공연 중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하여 스마트폰의 채팅기능을 이용해 배우들의 대사와 동시에 해당 메세지를 전달하고, 시각장애인에게는 스마트폰과 이어폰을 이용해 해당 장면과 상황을 전달하였습니다. 또한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보행이 불편한 관객을 위해 공연 시간 30분 전, 서울대입구역에서 공연장까지 휠체어리프트가 있는 버스를 운행하였다고 합니다. 
 
약 1시간 반의 공연이 끝나고, 어필 식구들은 공연의 기획자인 김원영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팜플렛에 실려 있는 김원영씨의 기획의도는 글 말미에 첨부하겠습니다.)

 
연극이 아름다운 예술인 이유는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참여해야만 완성될 수 있는 공동작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전의 공연이 감동을 주었던 이유도 모든 참여자가 장애의 유무에 관계 없이 어울리는 장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어필도 사회 내의 다양한 약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어울리는 장(場)이 되었으면 합니다. 
 
(작성자: 2.5기 인턴 공수진)

 

극단 <파전>의 2011년 12월 공연 <매직타임>

 

기획의도/ 김원영

 

내 고교동창은 반에서 성적이 좋지 않고,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고, 성격이 소심한 아이들을 작고 하찮은 존재, 즉 미물(微物)로 분류했다. 그의 말은 당시 고교생이었던 나에게도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우리의 세계가 어떤 사람들을 그와 같은 존재로 치부하고 낙인찍고 소외시킨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스스로가 이 시대의 ‘미물’의 대표적 표지인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소심하고 별 볼일 없는 성격을 가졌고, 평범함보다 더 아래쪽에 위치한 가족과 친구들을 가진 존재로서 나는 이 ‘미물론(微物論)’에 대하여 언제나 반론을 펴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다고, 혹은 절대로 매력적인 무엇인가를 폼나고 감동적이고 즐겁게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오름으로써. 그리고 다양한 곳에서 이질적인 삶을 사는 하나하나의 고유한 개인들이 관객으로 모여들어 어떠한 장벽도 없이 그 무대를 완성시키는 하나의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극단 <파전>이 만들어지고 연극 <매직타임>이 기획된 것은 바로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 세계를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만의 매력과 능력이 있다는 말은 진실이기는 하지만 진부하기도 하다. 또한 남태평양의 어떤 섬에서는 누군가의 몸도 아름답다는 말도 진실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충분치 않다. 누군가는 자기만의 능력과 매력을 발견하거나 표현하거나 나타낼 힘도 재화도 없기 때문이며, 그 이유가 미디어 권력의 농간이 되었든 어쨌든 상관없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협력과 상상력을 통해서 사람들 안에 잠재된 고유한 매력과 에너지를 발견하고 발명하고 표현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세계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획정한 그 틀 안에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자유롭게 유영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이고 싶었다. 즉 우리는 먼 섬나라의 아름다움이 주는 희소성과 숭고함이 아닌 바로 이곳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공연을, 배우들의 몸을, 이야기의 구조를 보이고 싶었고, 그 아름다움의 장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기를 바랬다.

 

우리들은 아직 젊고 아마추어들에 불과하며, 이 공연이 얼마나 완성도를 가질지 장담할 수 없다. 오랜 기간 연기를 배우고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치기어린 이벤트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표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열려있는 공연을 만들었다.

 

최종수정일: 2022.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