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2

2021년 10월 15일

2020년 4월,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다 총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다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취약성을 잘 보여주는 롱싱 629호 사건의 몽가베이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이 글은 Mongabay의 허가 하에 번역 후 공유되었음을 밝힙니다. / 원문링크: https://news.mongabay.com/2021/09/worked-to-death-how-a-chinese-tuna-juggernaut-crushed-its-indonesian-workers/amp/?__twitter_impression=true / 권이현, 윤소원, 김린지, 박지향 자원봉사자 번역). 

원문의 기사가 길어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①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1

③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중국 거대 참치 기업의 탄생

세프리, 아리, 리즈키, 베르날두스는 몰랐겠지만, 그들은 롱싱 629호의 새 주인 아래 첫 항해의 선원이 되기로 계약한 것이었다. DOF는 그를 세계 최대의 참치 기업으로 만들어 주길 바라는 욕심으로 진행된 합병의 일부로 다른 회사에게서 이 배를 구입했었다.

2000년에 전에 HSBC은행 직원이었고 의류 수출업자였던 리 젠유가 세 척의 연승선으로 DOF를 설립했다. 곧 DOF는 7 척의 연승선을 갖게 되었고, 리는 이로 인한 수익을 DOF의 고향인 랴오닝 지역에 있는 요트 건조 사업과 조선소 벤쳐에 투자했다. 랴오닝 지역은 황해를 건너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한 때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다롄은 선박 건조와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이곳에서 2012년 건조되었다.

일찍이 DOF는 중국의 값싼 노동력의 이익을 보았다. 일본은 한때 세계 최고의 원양어업 국가였지만 점점 바다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이 줄어들면서 선단을 축소하고 있었다. 중국은 아주 다른 상황에 있었다. 수만 명의 내륙 지역 출신 농부들이 부유한 동쪽 항구 도시의 산업 지구에서 일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그 때, 중국이 원양어업을 장려하는 이유가 바뀌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원양어업을 안정적 식량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이유로 장려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원양어업은 중국에서 “주출거(走出去)” 산업 중 하나로 분류되었고 이는 회사들이 해외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을 장려하게 되었다. 곧 정부에서 특히 연료를 위한 보조금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대 말 상승세였던 중국은 자신의 어업에 대해서 더 커다란 야망을 갖고 있었다. 정부, 선사, 대학들과 연계된 12명의 프로젝트 팀이 2010년에 어업 확장을 주장하면서 “해양생물은 가장 커다란 단백질 자원이며 그래서 바다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

다랑어류 중 가장 귀한 참다랑어는 일본 츠키지 어시장의 연례 참치 경매에서 최고 수백만 달러에 팔린다. DOF는 눈다랑어와 황다랑어에 집중하는데, 이들 또한 꽤나 몸값이 높다. 사진제공 Rhett A. Butler, Mongabay.

DOF는 중국 정부의 세계 어업 제패 야망을 기회로 포착했다. 2012년과 2013년에 DOF는 해외 투자자들과 첫 계약을 했다. 세 계약 당사자들이 DOF의 소수 지분을 사고 3,800만 달러로 DOF 지분의 29퍼센트를 인수했다. 바이어들은 아틀랜타 혹스 농구 사업을 갖고 있는 토니 레슬러가 설립한 LA의 아레스 매니지먼트, 중국 농업 타이쿤 리우 용하오, 싱가포르의 펀드 테마섹이 주요 투자자로 있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비공개 기업투자 펀드, US 음식 사업 거대 기업 아처-다니엘 미드랜드, 일본의 미츠이 재벌, 그리고 세계 은행의 일부인 국제 금융 기업(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이었다. DOF는 그들의 돈으로 더 많은 선박을 구매했다. 2012년과 2014년 사이에 DOF는 회사의 선박 수를 24 척으로 세 배 늘렸다. 하지만 이는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리 젠유(오른쪽에서 두번째)는 다롄 해양 어업 협회의 해면 어업 지사 대표직을 지냈다고 알려졌다.

DOF는 2014년에 홍콩 증권 거래소에서 기업 공개를 함으로써 더 많은 연승선을 인수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DOF가 증권거래소에 제출한 문서 서류에 오래된 데이터를 인용함으로써 최근 정보에 의하면 남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눈다랑어와 황다랑어 수산 자원이 마치 건강한 것처럼 개체수 상황을 왜곡했다고 그린피스가 문제 제기를 하면서 불발되었다. DOF의 서류는 또한 중국이 국내 회사들이 국제 포획제한을 어겨도 그저 무시할 것이다고 암시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수산부는 DOF를 “투자자들과 국제 사회를 심각하게 속이고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꾸짖었다. 그 이후 DOF는 부정적인 여론 속에서 기업 공개 원서를 철회했다.

증권 거래소 낭패 이후 세 투자자들은 DOF 투자를 철회했다. 그들은 중국 내 가장 큰 복합 기업, 여러 사모펀드, 정부 소유 자산관리회사 등 중국 투자자들로 대체되었다.

2021년 1월경 DOF 사무실

2017년에 DOF는 매년 정부 보조금으로 780만 달러 이상을 받고 있었고 DOF의 투자자 중 하나의 서류에 따르면 정부가 보조하는 어선 현대화 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보조금을 받기로 되어있었다. DOF는 2016년에 5,000만 달러의 이윤을 냈다고 하였고 2020년까지 “세계에서 최대 참치 기업”이 되려는 야망으로 56개의 연승선을 인수하면서 이윤을 두 배로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 해에 중국의 농림부는 DOF가 국내 최초로 유리 섬유 강화 플라스틱 초저온 연승선을 건조했다고 칭찬했다. 더 커다란 어선에 이 기술을 대입함은 어선이 연료와 유지비를 아끼고 더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낼 수 있음을 의미했다.

DOF가 기업 공개를 하려고 하고 실패한 지 2년 후인 2018년에  중국에서 가장 큰 간장 회사인 지아지아 식품은 7억 4,300만 달러로 DOF를 인수하려는 의사를 밝혔다. 지아지아 식품는 셴젠 증권거래소에 등록되어있었고 이 합병은 지아지아 식품 보다 컸던 DOF가 또 다시 기업공개를 하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중국 내 언론은 이 계획을 “뱀이 코끼리를 삼킨다”라고 표현했다.

출처: DOF의 실패한 2014년 홍콩 증권거래소 기업 공개, 2018년 Guoco Lawyers(상하이)의 법률 자문 및 감사Equasis
가치 평가액은 당시 DOF의 소수 지분 매수가에 기반한 것이다.

DOF와 중국 원양어업의 빠른 성장은 정부 보조금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값싼 노동력 덕분이었다. 2010년대 중반에 중국 내 오르는 생활수준과 고령화는 중국 인구로는 점점 선사들이 선원을 모집하기 힘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연합(SBMI)의 연구 및 대외관계의 코디네이터 디나 누리야티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 온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의 반값으로 고용될 수 있었다.

동자바지역에서 온 노동자 중 한명이 저질의 음식과 19시간 내리 일을 해야 했던 것에 대해 SBMI에 진정을 접수한 서류에 따르면 DOF는 2015 이래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하지만 디나의 말에 따르면 특히 중국 배에서의 노동권 침해에 대한 리포트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세프리와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젊은 인도네시아인들은 중국 배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수마트라에 위치한 펄프재 농장의 배수로 근처에서 굴착기가 작업하고 있다. 사진 제공 Rhett A. Butler, Mongabay.

“예를 들어, 농지가 많은 지역 출신인데 갑자기 그 지역이 개발 되기 시작하는 거에요”라고 디나가 말했다. 이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바다로 가게 하는 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높은 연봉과 좋은 일의 환경에 대한 약속 또한 그들을 바다로 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많은 약속들이 사기라고 말한다.

이게 물이 아니었다면, 저는 도망갔을 것입니다.’

경험이 많은 갑판원,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이 처음 롱싱 629호를 보았을 때, 그는 설렘을 느꼈다. 한국 부산 항구에 정박해 있는 그 배는 그가 타봤던 그 어떤 배보다도 두 배는 길고 다섯배는 무거웠다. 몹시 추웠던 2019년 2월 14일 밤, 그는 같이 일할 사람들과 승선하러 가기 위해 탄 작은 보트에서 선박의 빨갛고 하얀 선체를 보면서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르는 리즈키 옆에 앉아 있었지만, 굉장히 다른 첫인상을 갖게 되었다. 당시 19살이던 그는 영하에 가까운 추위 속에서 연승선에 오르며 그가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 느끼고는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지난 여름에, 그의 고향인 남 술라웨시 지역의 해양 아카데미에 있던 누르의 선생님이 그와 몇몇의 반 친구들에게 외국 어선에서 직업을 찾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졸업 후 6명은 송입업체에 등록하기 위해 자바로 여행했다. 하지만 롱싱 629호에 탑승한 22명의 인도네시아 선원의 대부분처럼 누르는 송입업체에서 그 어떤 트레이닝도 받지 못했다.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선임 선원 8명이 모두 중국인이라서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들은 오직 리즈키 핸드폰에서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중국어-인도네시아어 사전을 다운 받아온 구글 번역기만으로 소통이 가능했다.

2018년 중반 누르의 해양 아카데미 SMK Pelayaran Lintas Nusantara Barru에서 열린 졸업식

어선이 서태평양으로 가는 2주 여행을 시작하자, 리즈키는 같이 일하게 된 이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주된 일은 “세팅”과 “당기기”가 될 것이다. “세팅”은 수십 킬로미터를 넘는 낚싯줄의 새끼줄마다 미끼를 붙이는 것이다. “당기기”는 그 새끼 낚싯줄에 잡힌 물고기와 부표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들은 아직 효과적으로 일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팅과 당기기는 각각 12시간씩 걸릴 수도 있다.

우리가 인터뷰한 사람 중 두 명은 선임 선원들이 육체적인 학대를 시작한 건 오래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느리면 부감독이 그들을 때리거나 발로 찼고, 쇠막대기로 멍이 남을 정도로 세게 그들을 때리기도 했다.  남 수마트라 출신의 아리는 자주 타겟이 되었다. 대개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 하지만 하루는 그가 부감독을 밀어버렸다. 아리는 엉켜버린 메인 낚싯줄의 새끼줄을 풀고 있는 중이었고 그래서 그는 가위를 들고 있었다. 부감독은 칼을 들고 있었다.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리즈키는 바로 끼어들었다. “계약서에서는 만약에 우리가 그 누구와도 싸우면 계약이 해지되면서 아무것도 집에 갖고 갈 수 없다고 적혀있고, 가족들에게 창피해질 것”이라고 리즈키가 우리한테 말했다.

갑판원이 태평양이 다른 DOF 선박에서 낚싯줄을 다루고 있다. 영상제공 Raswin/롱싱601.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보통 일주일 내내 식사를 위한 10분 휴식시간 외에는 하루 18시간씩 내리 일했다. 6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에 그들은 샤워하고 세탁하고 잘 수 있었다.

그들은 대개 하루에 각각 30-40 kg 정도의 무게인 참치를 15-20마리 정도 잡았다. 하지만 한 달에 몇 번쯤 참치 떼를 보면 선장이 노동자들을 더 몰아쳐서 30시간 내리 일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에는 선장은 그들에게 메인 낚싯줄을 둘로 잘라서 세팅과 당기기 일을 동시에 할 수 있게 했다. 가끔 그들이 일하고 있을 때 선장은 위에서 밑에 일하고 있는 곳에 사탕들을 던지고는 했다. 리즈키는 말했다. “선장은 파라오 같았고 우리는 그의 노예 같았습니다.”

상어 지느러미가 롱싱 629호 갑판에 흩어져있다.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에 따르면 13개월의 항해 동안 갑판원들은 각각 40~50kg의 무게가 나가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 약 20개를 대략 1톤의 상어 지느러미로 채웠다. 사진은 승선해있던 인도네시아 선원 중 한 명이 촬영.

밥과 국수 외에는 노동자들에게 미끼 물고기와 변색된 닭고기, 오래된 채소가 주어졌다. 이제 21살이 된 또 한명의 해양 아카데미 졸업생 유드하 프라트마는 “밥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부족할 때가 많았어요. 우리는 같이 힘들게 일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았어요”고 말했다.

(왼쪽부터) 무하마드 알파타, 알디 레날디, 이펜디 파사리부가 미끼 물고기를 주로 먹었던 롱싱 629호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의 어업 코디네이터 로센 카라팟체브는 미끼 물고기는 “가축 사료”와 같다며, 주로 “항구나 어시장에서 누구도 먹거나 사고 싶지 않아 남은 물고기가 급속 냉동해 미끼로 쓰이도록 도매상에게 팔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국 선원들은 생수를 마셨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바닷물에서 증류된 물만 마실 수 있었다. 전에 어선 선원이었던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물에 소금기가 있었고 녹슨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유드하에 따르면, 그 물을 마실 수록 갈증이 더 났다.

“롱싱 629호에 있던 모두가 참을 수 없었고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이게 물이 아니었다면 도망갔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어요”라고 리즈키는 말했다.

여행이 시작된 지 6달만에 몇몇 선원들이 롱싱 629호가 연료를 채우는 동안 연료선의 와이파이에 연결하는 것을 성공했다. 청소년이었던 누르는 메세지 앱으로 어머니께 연락드렸고 어머니는 바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는 선원들이 승선한 후 처음으로 전화나 인터넷에 연결된 것이었다.

누르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었다. 그는 끔찍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가 벌써 바다에 있다고만 말했다. 5분 후,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

제가 살아남는다면, 저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2019년 12월, 세프리는 숨쉬기 힘들어졌다. 중국 선원들이 처음으로 그에게 생수를 주었지만 인터뷰한 이들에 따르면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의 룸메이트들은 번갈아가면서 외운 쿠란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세프리를 돌봤다.

12월 21일 해가 뜨기 바로 전 세프리는 화장실을 가려다가 쓰러졌다. 선원들이 그를 식사하는 곳으로 데려갔지만 그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아침 7시에 그는 죽었다.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그가 친동생같았다”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세프리는 롱싱 629호에서 사망한 첫번째 선원이었지만 질병에 걸린 첫번째도 마지막 사람도 아니었다

9월경 해양 아카데미 졸업생 유드하 프라트마는 자신의 다리가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가족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유드하 프라타마, 2021년 8월 촬영. 사진 제공 Febriansyah, Mongabay.

유드하는 건강해졌지만 선원 20명의 절반 가량(최초 승선했던 22명 중 2명은 다른 선박으로 환승했다)은 세프리가 쓰러진 달보다 한 달 전인 11월 쯤까지 모두 비슷한 증상을 경험했다.

이 증상을 가진 이들은 거의 서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리가 부은 것은 몸 위로 퍼져 더이상 그들의 바지가 맞지 않았다. 선원 경력이 있던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이 질병에 대해서 소문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발이 붓더니 갑자기 사망한다고 들었어요.” 그가 전에 탔던 어선에서의 선원들은 영양실조로 인한 각기병이나 상피병 등을 이야기 했지만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소문이었어요.”

인터뷰 기록을 검토한 다섯 명의 의사에 따르면 롱싱 629호와 DOF의 다른 선박의 선원들은 음식과 수질 관련 여러 가지 질병을 겪었을 수 있다. 대부분은 각기병의 가능성을 꼽았다.

한때 각기병은 긴 여행을 하는 선원들에게는 항상 일어나는 질병이었지만 19세기에 일본의 한 항해의사가 단순한 식단 조절로 예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드물어졌다.

하지만 각기병은 난민캠프, 외국인 보호소 등 다른 열악한 환경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또한 각기병은 원양어선에서도 발견되었다. 태국의 질병관리국은 캄보디아와 미얀마 선원들로 이루어진 태국 트롤어선에서 각기병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그린피스는 2016년에 이 문제들이 안 좋은 영양, 과로, 그리고 항구로 돌아가지 않은 오랜 기간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 내렸다.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대만 연승선 헝화 202호가 일본 도쿄 인근에서 활동하는 파나마 국적 냉장선 시앙 하오호로 냉동된 상어를 옮기고 있다.

각기병은 티아민 또는 B1 비타민 부족으로 일어난다. B1은 탄수화물을 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과로와 불균형한 식단은 몸 속 티아민을 고갈시킨다. 100% 확실하게 각기병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실험실 시험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의료진은 위험 요인들과 선원들이 겪은 증상들이 “젖은” 각기병이라고 알려진 질병과 일치한다고 했다. 이 병은 부종, 호흡곤란, 그리고 심장 부전까지 일으킬 수 있다.

콜로라도-덴버 대학의 간병과 고혈압 부서를 이끄는 리차드 존슨은 “제 예상에는 그들이 여러 질병을 겪었지만 가장 큰 병은 각기병이었던 것” 같다고 전화로 이야기 했다.

미국에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공중보건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HEAL Trafficking이라는 그룹을 설립한 한니 스토크로사 또한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선원들이 겪은) 증상 패턴이 각기병과 어떤 면에서는 일치하고 어떤 면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학적 문제가 복합적일 것(각기병+다른 질병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이메일에 적었다.

의료진 중 둘은 그 질병이 증류기나 보류 탱크의 문제로 인해 독성이 있는 물을 마셔서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공중 위생 코디네이터 알렌 박사는 “증류기의 결함은 산화철(주황빛 노란색)이나 유화철(노란색) 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보류 탱크의 결함 또한 중금속 오염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그는 또한 이야기했다. “소금물을 그러한 보류 탱크에 오랜 기간 두면 녹슬 수도 있고 이상한 맛과 색깔이 날 수도 있습니다.” 중금속이 안 좋은 맛의 물에 있다면 이는 심한 부종과 심지어 죽음으로 가는 심근증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미국과 아프리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응급실 의사 노아 로젠베르는 충분히 증류되지 않은 물에서 온 염분 과다가 간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했다. “간은 충분한 담수가 있어야만 염분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바닷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롱싱 629호의 갑판원 중 한 명인 이펜디 파사리부는 병에 걸리기 전과 후에 극심한 부기와 호흡곤란을 경험했다. 사진 제공 공익법센터 어필

세프리의 죽음은 그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갈등을 롱싱 629호에 불러일으켰다. 이슬람에 따르면 최대한 빨리 제대로 된 장례식이 치뤄져야 한다. 그리고 선원들의 계약서에 따르면 한 선원이 죽으면 그 시신은 항구로 가져가야 한다. 세프리가 사망했을 때 선원이 말해준 것에 따르면 선장은 처음에는 항구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위성 전화로 몇 번 통화를 한 다음에 선장은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세프리의 가족으로부터 세프리의 시신을 바다에 묻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세프리의 가족은 나중에 이 주장에 반대했다. 세프리의 여자형제 리카에 따르면 송입업체는 그 후 며칠 뒤에야 유족들에게 판투라에 위치한 사무실로 올 것을 요청했고, 그제서야 세프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리카와 그의 남편에게 알려주었다.

리즈키와 베르나르두스는 선장과 싸우려고 했으나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리즈키는 “싸우면 계약서가 파기 될 것이라고 걱정했어요.”라고 말했다. 세프리가 사망한 날에 시신은 임시 관에 넣어져 바다로 던져졌다. 바닥짐이 없는 관은 가라앉지 않았고 선원들은 관이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세프리가 사망한 후에 선장은 사모아로 항해했다. 이때쯤에 많은 다른 선원들이 심각하게 아팠다. 증상이 돌아온 유드하 프라타마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12월 26일, 롱싱 629호는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인 선원을 다른 DOF 어선에서 태웠다. 그 다음날 롱싱 629호는 세 번째 연승선, 롱싱 802호를 만나 유드하와 새로 온 선원, 그리고 병에 걸린 두 명의 갑판원 – 남 술라웨시 해양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무하메드 알파타와 카르만 – 을 그 선박에 태웠다. 사모아의 수도인 아피아 항구에서 온 롱싱 802호는 다시 항구로 돌아갔고 롱싱 629호는 바다로 나아갔다.

이 즈음에 알파타는 숨 쉬기가 힘들어졌고, 그 날 밤 사망했다.

유드하는 알파타의 마지막 말이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가족한테 이야기해주세요. 하지만 제가 살아남는다면 저는 결혼할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유드하.”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저는 ‘그래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마세요.’라고 말했어요.”

알파타 또한 바다에 묻혔다. 며칠 후 카르만, 유드하와 세번째 선원은 아피아 항구에 도착했다. 선장은 그들의 여권, 집에갈 비행기 표, 음식을 사먹고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갈 수 있도록 현지 돈을 건네주었다. 배는 선원들을 내리자마자 다시 공해로 돌아갔다.

롱싱 629호(파란색)이 롱싱 630호(빨간색)로부터 질병에 걸린 갑판원을 태운 후, 2019년 12월 말 롱싱 802호(노란색)과 만나는 모습을 위성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항에서 부은 발을 끌고 세번째 선원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밀면서 유드하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너무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공항 직원들이 비행기를 탈 때까지 그들을 돌봐주었다. “그들이 친절해서 천만다행이었어요”라고 유드하는 말했다.

그들이 자카르타에서 내렸을 때 아무도 그들을 마중나와주지 않았다. 유드하는 도시에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고향은 나라 절반은 돌아야 하는 거리에 있었지만 DOF는 그에게 집에갈 돈을 주지 않았고 그는 본인의 체크카드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카르만의 송입업체에서 밤을 보냈고, 어머니께 전화하여 집으로 갈 비행기 표를 얻었다.

그는 “저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저를 동물처럼 대했기 때문에요”라고 말했다.

최종수정일: 2022.06.19

관련 태그

관련 활동분야

인신매매 피해자 관련 글 더 보기
한국기업 인권침해 피해자 관련 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