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MZ 세대’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기억이 전혀 없다면, 제 나이를 대략 유추하실 수 있겠죠? 지하철 안이 시끄러워지면 조용히 해달라 말하기보다 블루투스 헤드셋의 볼륨을 키워 저만의 세상을 만들고, 잔망루피를 너무 좋아해 팝업 스토어가 열리면 가서 사진도 찍고 귀여운 굿즈들의 유혹으로부터 구매를 참느라 애씁니다. 이 2가지 예시는 전형적인 저희 세대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좋게 말하면 상대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 존중,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단절. 두 번째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소비력이 크지만, 사회적 약자처럼 관심과 지원이 절실한 이들이 아닌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물(ex 애완석, LP판 등) 또는 동물(ex 푸바오)에 거의 향하는 세대라는 점입니다.
모든 게 빠르고 다양해지는 작금에, 그 정도가 더욱 깊은 한국에서, 바르게 성장하고자 개인적으로 중용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왔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중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
덕분에 감성적이지만 감정적이지는 않으며, 현실적이고 효율적이지만 정이 많으며, 공부가 제일 쉽지만 2달에 1번은 친한 미얀마 난민 아동과 한강공원에서 축구를 하는, 균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든 세대의 특징이 두루 녹아있는 저는 국내 난민 이슈를 이끌 차세대 활동가가 되어 한국에 시급히 필요한 난민 전문 인력이 되겠다고 일찍이 마음먹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어필 크루분들께서 여러 업무를 믿고 맡겨주셔서 많은 국가에서 정말 다양한 박해 또는 공포를 받은 난민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외부 발설이 어려운 사례를 제외하고, 몇몇 사례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날, 사무실 밖 복도가 여느 때와 달리 웅성거려 문을 열었더니, 여유로운 표정의 덩치 큰 아저씨와 앳된 소년이 긴장한 채로 서 있었습니다. 첫 방문 및 당일 조력, 더군다나 난민 신청 전의 조력은 안 한다는 어필의 시스템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들어보니, 소년의 출국 명령서에 찍힌 날짜가 모레였고 본국 A국의 내전에 동원령을 통지받아 귀국 시 강제로 목적 없는 전쟁터로 끌려갈 게 뻔했습니다. 여권은 만료 직전이지만 본국 상황이 이러니 여권 갱신은 꿈도 꿀 수 없고 심지어 난민 신청을 비자 기한 내에 해야 하는 것을 모른 채로 2달을 지내(이 외에 위법적 행동 일절 안 함) 벌금 200만 원도 내야 했습니다.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김주광 변호사님과 함께 긴급 조력을 했습니다. 범칙금 및 출국 명령을 받은 자가 난민 신청이 가능한 지 관련 법률을 찾고 동료단체 피난처에 전화해 실무적인 조언도 받았습니다. 다행히 난민 신청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난민 신청서도 아랍어 버전으로 인쇄해 주며 “오늘 잘 생각 말고 숙소에서 이것만 써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통역해 주신 남성분은 대가 없이 소년을 도와주셨습니다. 소년은 영어도 한국어도 할 줄 몰라 길에 다니는 아랍인을 전부 붙잡고 한국어를 하냐고 물어보다 다행히 인도적 체류 비자를 가지고 한국어가 능통한, 같은 국적인 자신을 만났다고 합니다. 호탕하고 한국 아저씨가 다 된 그 분께 “진짜 좋은 일 하시는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블랙커피를 내리는 대신 커피 믹스를 타드리며 소년을 대신해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이 필드에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그가 난민 신청을 잘 맞췄겠거니 생각해 봅니다.
알고 보니 그는 소년이 아니라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더 마음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데이트 폭행을 일삼던 남자친구가 홧김에 여자친구를 경찰에 신고했는데 비자 연장을 몇 달 안 한 사실이 오히려 드러나 보호소에 구금된 갓 성인이 된 B국 난민 여성도 있었습니다. “많이 무섭죠”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울던 그녀가 생각납니다. 또한, 난민 신청이 불회부되어 인천공항 송환 대기실에서 지낸 C국 여성을 최갑인 변호사님과 함께 공항접견을 하러 갔습니다. 의지할 곳을 줘야겠다 싶어 비즈가 박힌 예쁜 제 머리끈을 몰래 드리며 불회부 취소 소송에서 이겨서 밖으로 나오면 다시 만나며 제게 주라고 했습니다. 피고 측의 거짓된 증거도 찾는 둥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패소했습니다. 머리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이분은 곧 본국으로 송환될 예정입니다. 운 좋게 안전한 한국에서 태어난 저와 달리, 같은 세대의 난민들이 찾아올 때면 항상 기분이 묘합니다.
‘배워서 남 주자’는 제 가치관입니다. 조부모님과 함께 자라 재래시장에서 여러 상황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봬서 그런지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레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세상은 물질(= 힘), 과시, 본인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저이기에 이런 대중적 흐름은 틀린 것도 아니라 생각하며 제게 금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물질 대신 가치, 과시 대신 간직, 나 대신 같이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친구들 눈에는 “유별난” 길을 가는 저지만, 저의 역할이 국가의 미래와 난민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조금은 당찬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MZ 세대들! 당당히 자신만의 길에 도전하길. 그리고 그 길이 난민 필드라면 환영의 포옹을 건네 봅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26기 인턴 박경은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