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국적을 가지고 한국에 사는 저는 난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찰이나 군인을 본다고 긴장되지 않고, 제가 뭔가 잘못하지 않는 이상 저를 체포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제가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고문을 당한다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남성인 저는 여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원 지하철을 타면서 제가 걱정해본 것은 사람들의 땀냄새와 불편함이었습니다. 밤에 골목을 걸으며 누가 따라오는 것 같다고 불안한 적이 없었고, 대학교 3학년 때 자취하며 누군가 내가 혼자 산다는 것을 알아차릴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신체를 가진 저는 장애가 있는 분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장이 난 신호등을 보면 투덜대며 무단횡단을 하며, 대중교통을 타고 내릴 때도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저는 이것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마치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운 리미트(극한)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 유토피아 같은 세상으로 리미트를 취하기 위해선,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살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을 때, 한국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고 했을 때, 거기에 “말도 안 된다.”, “그건 너만의 이야기다.”라고 말할 근거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누구의 의견이라도 의미가 있다는 것.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권이라는 것을 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라면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인권을 멋있게 정의해 모든 인간에게 최소한의 보호막을 제공해주려고 한 것이겠죠.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주체가 사실상 국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평소 느끼지 못했던 모순이 보입니다. 인간이라면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국가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기준이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국민이 인간보다 큰 개념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로부터 인권과 기본적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난민은 지금의 인권관(観)과 국가관을 정의하기 위해 묵음 처리되어야 하는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일까요. 난민분들은 어느 사회에서도 호명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