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5년 3월] #65. 누군가의 존재가 기쁘다는 감각 - 이일

2025년 4월 16일

우리들은 모두 누군가의 존재와 노력에 기대어 있지요.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 어디선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분들, 보이지 않는 곳의 노동자들, 저편을 느끼고 숨쉴공간과 환희를 주는 예술과, 삶을 연장시켜 주는 공기와, 음식, 무디어진 감각 속 생명을 감각하게 하는 꽃과 자연들까지. 이 목록을 계속 떠올리며 늘려가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런 순간을 갑자기 맞닥뜨릴 때들이 많았습니다.

조금 엉뚱하게도 2009년 겨울이 먼저 떠오릅니다. 단기법무관으로 군복무를 하기 위해 영천3사관학교에서 장교훈련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때도 훈련중에 발목 인대를 심하게 다쳐서 목발을 짚어야 했거든요. 훈련장소를 옮기는 와중 행군을 할 수 없는 저와 일부 열외된 생도들은 숙소에서 대기하며 동기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침구류와 각종 짐들이 가득 들은 군장이 2.5톤트럭에 가득히 도착했는데요. 누군가 여럿이 와서 옮겨주겠지, 그런데 누가? 하는 생각에 멍하게 있던 그때, 법무사관 훈육장교 두분이 오더니 그걸 전부다 생도들 방으로 던지고 밀고 옮겨서 침대에 다 가져다 두는 것입니다. 생도들은 몰랐던 순간들입니다. 두세시간이 걸렸을까요? 훈련에 지친 몸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웠던 생도들은 전혀 몰랐던, 그때 기억이 납니다. 아무도 몰랐을 일인데, 아 누군가 해주겠지, 어떻게 되겠지 하는 모든 과정에, 사실 누군가의 땀과 노력이 있구나.

부모님의 품을 떠나 혼자 자취하게 되면서 느끼게 된 부모님의 공백에서부터, 네 아이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기쁘게 보이지 않는 손길로 돌보면서, 어필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수많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노동자들의 땀과 고통, 부불노동들과 죽음에까지, 학문과 인권활동 마저도 누군가의 앞서간 길에 올라타서 한걸음 더 걷는 것임을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까지. 홀로가 아닌 기대어 있는 삶을 다시 깨닫는 것은 그 만큼 더 우리를 겸허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지난주 화요일 어필이 더 단단한 활동을 오랫동안 펼쳐나가기 위해 13년동안 정겹게 머물던 안국동을 떠나 회현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묵은 짐들, 버리지 못해 갖고 있던 문서들, 어쩌면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여러 물건들도 마치 예전 일기장을 넘겨보듯 꺼내보았습니다. 먼지도 털고, 가져갈 물건도 고르고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면서 ‘office warming day’라는 이름의 집들이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두가지를 생각하면서 준비 했었는데요. 첫째는 많은 복을 누리며 이사하게 된 만큼, 새로운 공간을 오가게될, 그리고 계속해서 응원해오셨던 분들이 ‘기쁘다’라는 생각과 ‘돌봄’을 조금이라고 경험하셨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분 한분 이름을 떠올릴때마다 그분들의 매일의 분투가 떠올랐거든요. 우리의 작은 파티가 쉼이 될 수 있을까. 둘째는 어필의 활동은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첫 문을 여는 이야기를 변호사들이 아니라 주인공이신 난민분들의 강연으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와주십사 부탁드린 강의에도 얼마나 기쁘게 응해주셨는지요.

예쁘게 장소를 준비하고, 찰나의 기쁨을 드릴 소중한 선물과 음식, 음악을 정성스레 준비하면서도 많이들 오시긴 어려울거라 생각했어요. 평일 낮시간에 어떻게, 다른 사무실 이사했다는 행사에 많이들 오실수 있을까요. 그런데 왠걸, 계속해서 어필을 만났던 난민분들, 후원자분들, 멋진 싸움을 해내가고 있는 연대단체 활동가분들, 추억을 공유한 인턴들, 옛 친구들까지 기쁜 맘으로 잔치에 참여하듯 누군가는 환한 미소의 축하의 얼굴로, 누군가는 정성가득한 말들이 담긴 화분과 선물들로 기쁘게 오시는 겁니다.

난민지위에 이어 최근 국적까지 얻으신 오래된 한 난민친구는 한국문화를 어떻게 잘 아시는지 롤휴지를 들고오시는 장면까지도, 어필의 멋진 이사선물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쟁이 끝난 시리아의 이들립에서 장인이 만들어준 무거운 액자를 들고 한국까지 가져온 친구를 보며 울컥해졌습니다. 대여섯분만 와도 최선을 다해 환영하자고 마음먹었던 아침, 정신없이 백여명이 넘는 손님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밤이 되었습니다. 오지 못했던 난민분들이 온라인에 남겨준 축하의 메세지들까지. 손님들과 헤어지고 나자 이렇게까지 축하받을 일이었던가? 어필이 이렇게 축하를 나눔직한 단체였던가. 동시에 이렇게 축하하고 서로를 기뻐하는 것이 이 세상을 견디고 살아내갈 수 있는 힘이구나하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계엄이란 초현실적 국면이 만들어낸 납작한 폭력의 세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선동이 공론장의 지분을 공식적으로 얻게 되고, 정명(正名)이 없어지고 언어의 외연과 의미가 허물어지며 사회를 지탱해온 약속들이 무너져가고 있던 지난 몇달 속 우울함과 숨쉴 수 없는 명치끝의 고통 속에 지냈던 기억들과, 전혀 다른 세상을 잠시 친구들의, 동료들의 환한 웃음과 진심 가득한 축하 덕분에 맛보았습니다.

쥴리앙, 어필에서 불리는 이름인데요. 사랑과 격려의 리더십으로 어필을 이끌어온 존경하는 정신영 변호사님을 이어, 어필의 새로운 대표가 되었습니다. 며칠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벌써 과거와 미래, 활동을 아우르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동시에 저는, 그리고 어필은 그만큼 앞선 선배들, 대표님들의 걸음에, 그리고 서로 기대어선 동료들의 든든함에, 후원자분들의 변치않는 응원에, 어필의 존재와 활동을 환한 얼굴로 지지하고 계신 분들에 기대어 여기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대표로서의 결심은 전임 대표님의 반만큼만이라도 하자는 것입니다. 앞서 싸우신 모든 선배님들의 어깨에 기대어 한발짝 위를 바라봅니다.

전세계에서 인권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상호연대 속 세워진 국제사회의 약속과 규범이 무너져가고, 평화가 짓밟혀갈 수록, 그리고 한국에서 점차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발언이 규범력을 획득해가고, 한국사회가 사람이 아닌 물화된 노동만을 선별하여 노예삼는 형태의 이주사회로 접어들어갈 수록, 동아시아에서 피난처로서의 한국의 자리가 점점 다져질 수록, 서로 환대하는 세상과 평화와 안전의 가치를 법으로 그려가야할 어필의 과제와 책임은 그만큼 더 커져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조그만 단체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혐오와 노예화의 물결에 대항하여 장판교의 장비처럼 날카롭고 분명하게, 원피스의 루피처럼 호쾌하게 웃으며 저희 뒤에 서 있는 난민들과 취약한 이방인들의 곁에서 단호하게 서있어야 하겠지요.

어필은 여기에 계속 있겠습니다. 어필이 여기서 치열하게 땀흘리고, 냉정하게 싸우고 그만큼 한국사회 속 이방인들로 지워진 사람들의 인간으로서의 공간을 한뼘씩 넓혀가고, 목소리가 없는 이방인들의 날카롭고 명징한 목소리가 되는 것, 어쩌면 어필이 있어서, 누군가 거기서 싸워주고 있어서 생각하면 기쁘다라는 감각을 여러분 모두에게 계속 선물해드릴 수 있도록 묵묵히 싸워나가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사랑과 응원, 지지 속에 기대어 온 어필은 계속해서 여기에, 생각하면 뿌듯하고 기쁨의 미소를 여러분들이 머금으실 수 있도록 단단히 서있겠습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응원에 기대어 서있는 저희들이, 또한 여러분들의 삶을 희망과 기쁨으로 지탱해 드릴 한 작은 조각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우리들의 미래를 온마음을 다해 응원합니다.

이일 변호사 작성

최종수정일: 202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