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제가 소송지원을 하고 있는 라나[1]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변호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언제 잠깐 통화 가능할까요”
라나와는 2019년 4월 경에 처음 만났습니다. 아랍어를 모국어로 하는 국가에서 온 그녀는 놀랍게도 이미 기초 수준의 한국어 구사가 가능하였습니다. 아랍어와 한국어는 언어간 거리 (language distance)가 가장 먼 언어들이어서 상대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어렵다고들 알려져 있기도 하지요. 라나의 한국어 실력이 놀라워 물어보니, 그녀는 K-드라마, K-pop을 좋아해서 중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해왔다고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습니다.
싱그러운 그녀의 눈빛 뒤에는, 현 남편으로부터의 가정 폭력 및 어린 시절부터 당해 온 부친으로부터의 정서적 학대 및 폭력이라는 어두움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당시 18세의 라나는 본국의 한 대학 영문과에 합격하였지만, 대학은 커녕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그럼 결혼하는 대신 대학 공부를 하게 해달라’는 씩씩한 약속을 부친으로부터 받아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 전 3분 가량 통성명을 한 것이 다인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구요. 원하는 대학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갖은 욕설, 물리적 폭행, 죽인다는 협박 그리고 강간을 지속적으로 당해왔습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맞아 생긴 몸의 상흔들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는데, 이 사진들을 왜 찍어뒀냐고 물어보니, “사실은 저 진짜로 죽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냥 죽으면 제 가족들은 제가 왜 죽었는지 모를 것 같아서요. 사실 언니와 엄마에게 제가 맞고 산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 ‘네가 남편한테 더 잘해’ 라는 말만 들었거든요.”
난민협약과 우리 난민법상 젠더 폭력(gender-based violence)이 난민 박해사유에 해당되긴 하지만, 실제 난민인정 심사시에는 직접 증거의 존재 및 진위성 , 증거와 진술간의 정합성 등을 매우 엄격히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난민인정률이 1-3% 대에 머무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한데, 특히 라나처럼 박해의 직접적인 증거 (예를 들어, 가해자의 형사절차 관련 공문서, 언론 기사 등)가 없는 경우 난민 인정의 길은 더욱 소원해집니다.
라나 역시 박해를 증명할 만한 결정적 증거가 없고,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들로 출입국으로부터 ‘난민불인정 결정’을 받았고, 이에 법무부에 이의신청을 하였지만 ‘이의를 기각’한다는 결정을 받아, 결국 현재 소송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불인정’을 확인하는 단계가 거듭될수록 그녀 또한 점점 해를 등진 겨울 나무처럼 변해갔고, 결국 소송지원을 위해 상담을 하였을 당시 그녀는 저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라나에게서 최근에 메시지가 왔던 것입니다. ‘변호사님, 저 한국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라는 그녀의 첫 마디에, 저는 ‘일단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창 소송이 진행 중인데, 라나와 제가 함께 견뎌오고 힘써 온 6년이 덧없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만큼, 어떤 결과든[2] 보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만난 날, 우린 많은 말을 했지만, 라나의 이 한 마디로 저는 라나를 설득해 보려했던 저의 마음을 차마 꺼내어 보일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님, 제가 한국에 와서 난민신청한 이후 지금까지 저는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원을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의 제 삶은 ‘출구없는 원을 걷는 것’ 같았어요. 빠져나오고 싶은데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 길이 안보였는데, 생각해보니 한국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 이더라구요.”
난민신청자로서 본인이 잠시나마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내어 준 한국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자, 라나는 한국에 온 지 1년도 안되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카페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얻었고, 하루에 6-7시간씩 일하는 카페일을 쉬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빠듯했지만 생계 역시 남에게 손벌려 본 적 없는 당찬 그녀였습니다. 지난 해에는 한국어능력시험 (TOPIK) 최고 등급인 6급도 합격을 했고, 최근에는 본인의 경험과도 관련된 ‘트라우마 치료’에 관심이 생겨, 관련 자격증 취득을 위해 강의를 듣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뭐든 배우기 좋아하고 한국을 사랑했던 라나에게 6년이 다 되어가는 ‘난민불인정자’의 삶을 좀더 ‘견디어 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려웠습니다.
라나의 출국 전 날, 저는 라나의 (어쩌면) 한국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싶어 찾아갔습니다. 선물로 주고 싶었던 다이어리도 준비했습니다. 라나가 발걸음을 옮긴 곳에서는 라나의 밝음과 생기로 가득 찬 시간들을 써내려가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다이어리에 잠깐 손을 포개어 기도하였습니다.
“한국에 다시 오면 연락할게요 변호사님! 수고하세요 😊” 라는 메시지로 라나와 저의 메시지창은 닫혔지만, 우리 또 새로운 시간을 열어가요 라나!
(잔나비- 모든 소년 소녀들1: 버드맨 가사 중[3])
“날지 못할 친구여, 탈을 쓴 내 친구여!
헝클어진 머릿결의 시절을 지나세”
불어오는 바람에 머릴 쓸어 올리고
꿈으로 얼룩진 바짓단을 털었네
전수연 변호사 작성
[1] Rana – 아랍어 여성의 이름을 찾아보다가, 아랍어로는 '우아함, 매혹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라나’가 그녀와 어울려 가명으로 선택하였음.
[2] 내심으로는 어떤 결과가 아닌 ‘승소’의 결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