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연말 시상식 시즌입니다. 최고의 영예는 뭐니 뭐니 해도 대상이겠습니다만, 데뷔한 해에만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신인상도 못지 않게 특별하다고들 말합니다.
저는 올해 5월에 어필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정식 크루 멤버가 된 지 이제 막 일주일 정도 된 참입니다. 지금 가장 생생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나름 크루 신인(?)인 지금 이때에 어떻게 공익변호사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 나누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에서 저는 일부러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단어를 골랐습니다. ‘왜 공익변호사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왠지 저의 선택이 전제되어 있는 느낌인데,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무수한 우연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굵직한 우연들만 뽑아서 얘기하자면, 일단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대부분 그 무렵 장래희망에 관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으실테고, 딱 떨어지는 하나의 장래희망이 없어서 고민하셨던던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는데, 다만 ‘절대 되고 싶지 않은 직업’ 부동의 0순위를 지키던 것은 있었습니다. 판사. 무작정 싫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 (판사는 아닐지라도) 법조인이 되었으니 정말 인생사 알 수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죽어도 판사는 싫다던 저를 법조인의 길에 들어서게 한 변화구는 ‘국제법’이었습니다. 법의 ㅂ자만 보여도 십 리 밖에서 피해가던 저였지만 학부 전공 과목 중 하나여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공부하게 된 제 생애 첫 법학은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국제법을 보고 있노라면 ‘팀플 절망편’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서너 명이 모여서 하는 팀플도 심심찮게 파토가 나는 마당에 적게는 수십, 많게는 거의 이백 개 국가들이 함께 하는데 순탄할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망할 게 뻔해 보이는 이 팀플이 여하튼 굴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사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심지어 팀플이라는 굴레를 강제하는 교수님의 존재도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이 점이 너무 흥미로웠고, 제 식대로 표현하자면 국제법은 그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법이었습니다.
국제법을 책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맛보고 싶었던 저는 NGO에서 일해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제법과 NGO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시는 예리한 당신, 맞습니다. 저는 국제법 교과서에 자주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로 NGO 지원을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2017년 가을 그 당시 올라와 있던 공고가 두 개였는데, ‘피난처’와 ‘공익법센터 어필’이었습니다. 다 지나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주·난민 쪽 일을 하게 될 운명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을 막 시작한 2018년 1월, 제주도에 수백 명의 예멘 난민이 들어왔고, 우리 사회가 그때까지는 외면하고 있었던 난민의 존재와 ‘강제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당황스러운 현실과 대면하게 되었는데, 관련 경험이 있는 사람이 흔치 않다 보니 저의 일천한 경험만으로도 전문성을 갖춘 것처럼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피난처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들이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였으나 저는 정말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열린 세미나와 각종 행사에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깨닫고 보니, 속된 말로 ‘쪽팔림’을 좀 어찌해 보고자 좌충우돌했던 그 발자취가 어느덧 제 이력서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선택을 한 순간을 굳이 꼽자면 이 순간을 꼽을 수 있겠는데, 저는 우연이 채운 제 이력서를 새로 쓰지 않고 계속 품고 갔습니다. 해오던 것을 계속하는 관성에 힘입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선택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학부 때 서어서문학을 전공했던 저는 한때 진지하게 통번역사를 꿈꿨는데, 법학전문대학원에 이미 진학한 상황에서 다시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했고 (저는 매몰비용을 쿨하게 무시할 만큼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법조인으로서의 일이 통번역과 결을 같이한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짧은 제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소수자 이슈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꼽으라면 그들의 인권이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는 데는 구조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고 당사자인 소수자들이 이를 지적해도 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소수자 인권 이슈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릴 수 있게 만들고 그들의 고통이 마땅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임을 선언하는 것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변호사가 하는 일도 일종의 ‘번역’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법은 많은 경우 소수자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다수를 대표하는 입법 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다수자의 언어’로 쓰여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순이 소수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다수자의 언어를 소수자의 언어로 번역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비틀거리며 짓다’ 작성을 제안 받았을 때 어떤 취지로 시작된 것인지 여쭤보니 저희가 하는 일은 속속들이 공유하고 홍보하는데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공간이 마땅찮은 것 같아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에 대해 써본 것인데, 써놓고 보니 소개보다는 넋두리같습니다.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나 동기에 대한 질문을 좀 더 많이 받지만 별 대단한 뜻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에 좀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것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께서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김희진 변호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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