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혼란스러웠던 작년 겨울,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큰 격려와 자랑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이전에 읽었던 한강 작가의 책들이 너무 어려웠고, 무엇보다 읽는 내내 불편하고 힘들었던 기억때문에 문알못(문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소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관심 여부와 무관하게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모든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기에 일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짐작을 했을 때에 한강 작가는 깐깐하고 어려운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었지만 화면을 통해 전해 듣는 작가님의 말은 차분하고 우아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소식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반응에 흔들림 없이, 지독히도 차분한 목소리와 고유한 자태로 담담히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홀리듯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상소감을 듣던 중, 작가님이 마음에 품어왔던 질문을 접했고 자연스럽게 그동안 어필에서 보고 들은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어필에서 일을 하기 전에는 기자회견에 참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애 처음으로 기자회견에 참가하던 날, 긴장된 마음으로 약속된 장소를 찾았습니다. 기자회견이라고 해서 수많은 기자들과 카메라를 떠올렸던 저의 예상과는 달리, 기자회견장에 기자는 보이지 않고 단체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기자들이 관심이 없는 사안은 취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기자 없이도 기자회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미얀마에서 군부와 결탁하여 가스 채굴을 하는 기업의 본사 앞에서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했었는데, 화려한 고층빌딩 앞에서 10명 남짓한 단체 사람들끼리 현수막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처량한 느낌도 들었는데, 진행을 하던 활동가 선배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장하게 사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지나갔었지만 아주머니 한 분이 비 맞지 말라며 우산을 챙겨 주시는 모습을 보고, 현수막 뒤에 비장한 얼굴로 서있다가 왠지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에도 기자 없는 기자회견을 많이 개최도 하고 참여도 해왔습니다. 인도에서 제철소를 짓기 위해 숲을 파헤치고 주민들을 강제이주 시키려는 기업의 본사 앞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아동강제노동으로 수확한 면화 부산물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기업의 본사 앞에서, 미얀마에서 노조 활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기업의 본사 앞에서, 베트남 자회사의 하청업체 노동자에게 일어난 산업재해를 무시하는 기업의 본사 앞에서 등등 여러 곳에서 기자회견을 했지만 대개는 큰 건물 앞에서 취재진도 없이, 한 줌의 사람들끼리 진행한 조촐한 기자회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국 기업의 해외 사업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한국에서 취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외 사업장에서 일어난 인권환경문제를 한국에서 문제제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고려할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한국에 있는 본사가 해당 해외 사업장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 단순 거래처인지, 지분 소유 및 운영권 행사 등의 권리가 있는지 등을 고려해서 한국 본사의 영향력을 파악하고, 요구사항을 정리해야 합니다. 피해자들이 구제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요구사항을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것도 여러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해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관할권의 문제로 국내의 사법절차를 활용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비사법적 절차를 주로 활용하게 되는데,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 따른 진정절차나 유엔 등의 절차는 리소스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반면 피해자들에게 실효적인 구제책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사안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방법으로 기자회견을 활용해온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기자회견을 거듭하던 중, 기업이 자신의 국내외 공급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환경위험을 미리 식별하고 대응책을 세우도록 의무를 지우는 법이 유럽을 중심으로 제정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에 기업이 인권환경실사를 통해 자신의 공급망 전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권환경위험에 대해 미리 식별하고 대응하도록 하고, 실사 내용을 공개하도록 하는 법이 21대, 22대 국회에서 발의되었습니다. 법안은 사업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해관계자로 실사 과정에 참여할 것을 보장하고, 정부가 기업의 실사 여부에 대해 감독을 하고 시정명령을 내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법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국회의원을 찾아 발의를 요청하는 과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이 필요하다는 데에 마음이 모아지기까지의 수많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법안 발의 기자회견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진행했던 조촐한 수많은 기자회견이 떠올랐고,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 난 것은 작년 11월 세상을 떠난 태완님이었습니다. 태완님은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왔지만 체류자격이 없어서 공부도 취직도 할 수 없었고, 미래를 꿈꿀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체류자격을 얻어 평범한 삶을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태완님은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완님을 오래 돕던 이들, 그리고 이들을 가까이서 멀리서 지지하고 돕던 사람들은 모두 슬픔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공교롭게도 태완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주배경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체류자격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 영상을 촬영했었습니다. 캠페인 영상 속 태완님은 체류자격이 생겨서 할 수 있게 되었던 일들 – 핸드폰을 자신의 명의로 개통하고, 운전면허증을 딴 이야기를 하며 희망이 보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3월, 법무부가 이주배경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류자격 부여 조치를 연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상 속 태완님의 얼굴이 떠올랐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완님의 장례를 무사히 치른 후, 태완님을 가까이에서 돕던 이주와인권 연구소의 김사강 박사님과 태완님의 어머니가 사무실에 감사 인사를 전하러 방문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실이 이사했다는 것을 아시고 예쁜 화분도 사다주시고 맛있는 점심도 사주셨는데, 오후에는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남산에 태완님 어머니와 함께 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태완님 어머니와 남산을 오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국에 온 지 30년이 되었지만 바빠서 구경도 못하고 다닌게 너무 아쉽다며 젊을 때 여러 좋은 곳을 다녀보라는 말씀도 해주셨고, 태완님과의 여러 추억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아들과 함께 세상을 떠나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주변에서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 말씀을 듣고는 한강 작가의 질문이 향하는 곳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사랑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가슴을 연결한 금실이라 이야기했던 작가의 눈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살린 것이 어머니 곁에 있던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도록,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홀로 할 수 없기에,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서로의 가슴 사이에 연결된 금실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강 작가의 질문을 통해 돌아보게 된 활동과 서로의 가슴 사이의 금실을 소중히 여기며, 어필의 일이 앞으로도 다른 이들을 살려내고 사랑하는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신영 변호사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