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5년 7월] #68. 어필의 릴리였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어필. - 전수연 변호사

2025년 7월 21일

어필의 첫인상은 JC(김종철 변호사) 와 데이지(김세진 변호사)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 후 공익 섹터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소망은 로스쿨 재학 기간에 더욱 진해졌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졸업 후 로스쿨 동기의 소개로 ‘어필’이란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어필 사무실에 찾아갔던 2015년 5월의 어느 햇살 좋았던 날 아침, 버스에서부터 콩닥거렸던 맘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사무실 문 앞에 다달아 노크를 하였습니다. 저를 가장 처음 맞아주셨던 분은 JC, 제게 손수 내리신 따뜻한 커피와 어제 손님들이 선물로 주셨다는 초콜렛들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뒤이어 핑크색 가디건을 걸친 데이지가 들어오셨고, 저희 셋은 그렇게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봄햇살의 온도와 같이 잔잔한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습니다. 훌쩍 흘러버렸던 한 시간, 이야기를 마치고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두 분은 제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기다려주시고, 문이 닫힐 때까지 미소로 배웅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 받아봤던 가장 황송한 대우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정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난민 업무에 대한 낯섦이 있었지만, 이런 분들이 계신 곳이라면 같이 배우고 공부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버틸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곳일 것이라는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났습니다. 어필의 첫 인상은 이렇듯 온화했지만 강렬했습니다. 이렇게 어필과의 첫 만남이 시작된 지 어느덧 만 10년이 조금 넘었네요.

그간 어필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건들과 사람들을 만나며 아름다운 소풍길 같은 시간들도 있었지만, 어필이 담당하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에는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며칠, 몇 달간 가쁜 호흡으로 공력을 들였다 하여도, 그 결실 (정확히는 좋은 결실, 이기는 결실)을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례로 저는 성착취 인신매매 피해자들의 변호사로서, 피해자들의 사회적∙경제적 취약성을 이용하는 가해자들이 마땅한 처벌을 받도록 하기 위해 2년간 고군분투하였으나, 관련법의 구조적 한계와 수사기관 및 법원에서 피해자들의 피해자성을 고려하지 않은 ‘유죄의 직접증거’에 대한 집착적 조사 및 판단으로 인해, 피해자들의 일관될 뿐 아니라 처절한 진술이 차고 넘침에도 가해자는 무혐의를 받았고, 이는 관련된 민사∙행정 사건의 소송 결과에게도 줄줄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성들이 다 알고도 돈 벌려고 불법업소에서 일한 것 아니냐’는 취지의 모욕적인 한 줄이 판결 이유에 기재된 것을 보며, 한동안 무력감에 시달렸던 적도 있습니다.

성착취 인신매매피해자 지원으로부터 시작된 취약한 여성들에 대한 저의 관심은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성폭력 피해 사건들로도 확대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알고싶다 (SBS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잔혹한 살인 사건들의 (체감상) 90% 이상은 피해자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것이 눈에 띄게 다가왔고,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이유없는 화풀이성 칼부림이나 폭행의 피해자들, 불법 촬영 및 유포로 고통받는 피해자들, 교제 폭력 피해자들의 성별은 거의 ‘여성’이라는 것에 같은 여성으로서 허망했고, 변호사로서 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어필을 떠나, 여성주의적 ∙ 피해자 중심의 시각에서 성폭력을 포함한 젠더 기반 불평등 또는 혐오로 인한 폭력범죄의 피해 사건을 중점적으로 변론하고, 성폭력 가해 사건의 변론을 맡지 않는 것을 기치로 내건 곳에서 변호사로서의 두 번째 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필을 떠나는 마음이 쉽지 않았고, 아직 동료들이 손수 써준 카드도 열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어필과의 작별을 실감할 용기가 나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어필과 저에게 일어난 변화들이 선형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진일보한 추동력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로 담담히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간 제게 아낌없는 신뢰와 사랑을 주셨던 어필, 그리고 어필을 사랑해주시고 늘 격려해주시는 후원자님들, 어필에서 만나뵈었던 난민분들과 피해자분들, 여러 자리에서 긴밀하게 협업해왔던 활동가님들, 변호사님들, 어필로 인해 인사드렸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마웠습니다 어필.               

최종수정일: 202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