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때 심한 가정폭력을 겪었습니다. 한번 맞기 시작하면 마치 터져 나오는 작약꽃과 같은 선명한 빨간빛 계열의 동그란 멍, 아이리스와 같이 연자줏빛 기반에 황갈색이 그라데이션(Gradation)을 이루는 경계가 불분명한 멍, 메꽃과 같이 여린 새벽빛을 머금은 은은하고 아름다운 멍이 몸 구석구석에 다발적으로 들곤 했습니다. 몇십 분을 맞고 또 맞다 보면 마치 겨울 밤하늘을 화려하게 뒤덮는 오리온자리와 같이 멍들이 온몸을 복잡하고 빽빽하게 수놓았습니다. 안 맞으려고 그 어린 나이에 어딘가에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속담을 듣고 와서 하루 종일 억지로 웃어보기도 하고, 또 반대로 표정을 찌푸리고 있으면 이미 안 좋은 일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때리겠냐는 어린 생각에 온종일 인상을 찌푸리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도 갖가지 이유로 찾아오는 지옥 같은 폭력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과 자기혐오, 분노만 남아서 혼자 화장실 구석에 앉아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애꿎은 이빨을 좌우로 드르륵드르륵 갈면서도 눈물 흘린 흔적이 있으면 또 맞을까 봐 터져 나오는 설움을 겨우 삭혔습니다.
투명 인간이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매일 밤 무엇인가에 깔리는 악몽을 꾸면서 가위에 눌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이 상황을 회피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함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외로움이라는 뱃고동이 마음 깊숙한 곳 낮고 날카롭게 공명하고, 오늘 하루도 안 맞고 조용히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그게 어디냐고 자위하면서 또 그다음 날 안 맞기 위해 눈치 보는 외줄타기 생활을 이어갈 때, 당시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심각한 가정폭력이 의심되니, 가해자와의 즉각적 분리 조치나 다른 조처를 곧바로 취할 것”이라고 강하게 권고하며 저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또 그 적극적인 중재가 계기가 되어 해당 가족 구성원과 제가 물리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았다면, 제 삶의 궤도가 또 어떻게 엇갈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을 곰곰이 반추해 보면 드는 두 가지 생각 중 하나는 누구든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언제든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필에서 인턴으로 있으면서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또 군사정권의 통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군의 표적이 되어 강제노역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더 나아가 수시로 공중 폭격을 당하기도 하는 미얀마 친주 마라족 사람들, 이집트 엘시시 쿠데타에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법 구금과 사형을 당하는 무슬림 형제단 구성원들, 그리고 전환 광물 생산 과정에서의 니켈 광산 개발로 토지를 수탈당해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인도네시아 토착민들, 각종 성착취와 성폭행에 노출되는 성폭력 피해자들 등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본인이 사회적 약자가 되고 싶어서 되었거나, 사회적 약자가 되리라 예견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이렇듯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회적 약자가 된 사람들은 보통 본인 자체의 힘이나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는 마땅히 본인에게 닥친 어려움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미얀마 친주 마라족 출신의 난민 신청자,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구성원 출신의 난민 신청자, 니켈 광산 개발로 토지를 수탈당한 인도네시아 토착민, 그 외에도 출국대기실에서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부터 소송 관련 문제들을 겪으며 고통받는 공항난민들, 또 외국인 보호소(사실상 외국인 수용소에서 이름만 보호소로 바꾼)에서 체류자격이 없다는 명목하에 구금당하고 기본적인 인권들을 박탈당하며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구금된 외국인들, 계절노동자 제도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서 브로커에 의해 임금을 착취당하고 돈을 내지 않으면 친척들이 형사 처벌을 받게 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은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혼자서 타개할 만한 힘이나 자원이 부족합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손 내밀어 도와주는 사람의 중요성과 고마움을요. 이렇듯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손짓을 마다하지 않는 어필의 중요성과 감사함을요.
어필은 참 신기한 곳입니다. 반오십 년 가까이 살면서 누구를 닮고 싶다, 또는 누구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지 않은데, 어필 속 구성원들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나도 나중에 좀 더 성숙해지면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시로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본인의 시간과 삶의 큰 부분을 기꺼이 희생하고 매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어렵고 회의감이 많이 드는 싸움에 지칠만할 텐데도 그다음 날 환한 미소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필의 어른들을 보면서 어느 순간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어디선가 본 문장이 있습니다: “You may not be able to change the world, but you can change the world of one person” (당신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언정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꿀 순 있다). 저는 어필에서 소중한 기억, 그리고 어필에서의 배움을 기반으로 하여 그 외의 삶의 영역에서도 소중한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저의 상처를 무한히 긍정적인 에너지와 선한 영향력으로, 또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돕는 원동력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고 싶습니다.
(어필의 구성원들에게, 또 그들이 하는 일을 응원해 주는 모든 분에게 감사함과 사랑을 표하며, 공익법센터 어필 27기 인턴 이상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