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을까요. 저는 자주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막연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따뜻한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머무를 공간도 충분했지만, 그 모든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방향을 잃은 듯한 느낌,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리적인 장소로도 채울 수 없는 이 감정은, 어쩌면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 속에서 제가 진정으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던 저에게 문득 떠오른 것은 학창시절 봉사활동을 하며 만났던 고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고려인 특별법이 개정되기 전, 그 아이들은 한국에서 자랐지만 성인이 되면 이곳을 강제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고국이라 믿었던 이 땅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 아이들은 저보다 훨씬 더 막막한 ‘돌아갈 곳 없음’의 현실을 살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는 조금 다른 이유지만, ‘돌아갈 곳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현실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을 돕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그들을 돕는 과정에서 제 방황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필에서의 인턴을 시작하였습니다. 난민 신청자들이 떠나온 나라의 상황(국가정황정보)을 조사하며 그들의 떠남이 단순한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고서 속에 담긴 글자들은 차갑고 객관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삶을 지키려는 치열한 싸움과 절박함이 녹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문서 너머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다가왔습니다. 하루는 난민신청자 A씨의 면접에 동석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순간의 긴장과 불안, 그리고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간절함을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국에서 겪었던 박해를 이야기할 때 그의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과 눈빛 속의 두려움은 단순한 글로는 결코 전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A씨와 함께 점심도 먹었는데, 그 시간은 제가 처음으로 난민 분과 1:1로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가족과 일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와 나눈 작은 대화와 일상의 순간들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다가서는 다리처럼 느껴졌습니다. 9시간가량의 긴 면접을 마치고 정부종합청사를 나설 때, A씨는 저에게 오늘 하루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또 친구가 되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법률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곁에서 함께 있어주고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6개월간의 인턴 기간 동안 수많은 난민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느낀 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법률적 문제에 대한 지원도 물론 필요했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곁에서 함께 지지해주는 작은 연대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민을 비롯한 취약한 이주민들은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짊어지며 용기 있게 나아가고자 하는 강인한 사람들이었고, 저와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자, 많은 것을 가르쳐준 선생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국과 가족의 곁을 떠나 복잡한 법적 절차를 헤쳐 나가는 동안, 매일 작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저는 제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세상의 안식처를 만들어 나가는 여정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필에서의 일상 속에서도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일하며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끊임없이 격려하며, 난민분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방황하던 제 마음의 답은 바로 이 연대의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처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걸어가는 연대의 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이유와 의미로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순간 서로에게 기대어 걸어가는 연대와 환대의 여정이 서로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위로와 기댈 곳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따뜻한 세상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함께 안식처를 만들어가며, 모두가 마음 둘 곳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26기 인턴 조민재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