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3년 9월] #46. 9월부터 1년간 일을 쉽니다 - 이일 변호사

2023년 9월 6일

1년동안 업무, 사무실, 직함에서 떠나 안식년을 가집니다.


주변에 너무 고생하시는 분들 많고 이런 복을 누리는 것이 죄송스러운 맘도 들지만 제가 일년간 일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수원 마치고 해군 법무관으로 제주, 국방부를 떠돌고 2013.부터 어필에서 일을 시작한지 10년만인 것 같아요.

어필의 멋진 제도 덕인데, 사실 몇 년 전에 이미 멈췄어야 했는데 책임을 진 난민분들의 조력을 나눌 방법이 전혀 없는 상태여서 미뤄졌어요. 기적처럼 감사한 동료들이 새롭게 어필에 와주시고, 모든 분들이 제 짐을 나눠주셔서 이렇게 겨우 일을 멈출 시기를 갖게 되었답니다. “제발좀 쉬어라” 이 말을 가볍지 않게 하면서 기꺼이 제 짐을 져주신 어필의 동료들, 자신들의 일처럼 저를 걱정하고 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고, 그만큼 일년을 잘 보내고 건강하고 충전된 모습으로, 더 한단계 앞을 생각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듭니다.

모든 분들이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계신데 1년동안 일을 쉰다니 분에 겨운 이야기지만, 해결책도 없으나, 다른 곳에 의탁할 수도 없는 난민들의 절박한 처지를 10년 동안 거리에서, 공항에서, 구금시설에서, 법정에서, 공무원들과 싸움에서 맞닥뜨리면서 정직히 말해 지금은 더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소진되었습니다.

웃기가 어렵고, 어떤 시공간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추는게 어렵고, 사람을 보고 대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마주 대하는 모든 일이 그렇지만, 공익변호사로서 난민들의 곁에 선다는 것은 한국에선 구조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하는 구조대원의 일과 같더라구요. 전쟁터 속 야전 병원에서 답없이 밀련오는 환자들에게 응급처치만 하는 그런 모습... 구조할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든 나라에서, 모든 상황 속에서 연락을 해오지만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역량 속 겨우 몇분을 구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광대처럼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보여야 하고, 동시에 먹먹한 슬픔을 견뎌야 하는 일.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을 덤덤한 것처럼 듣고, 절망 속에 분노하시는 분들에게 웃으며 희망이 있다고 믿음을 주고 다독여야 하는 일.  난민옹호활동의 현장은 사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막막합니다. 별거 아닌 법률가들의 일들에서도요. 화있을진저 너희 법률가들아

난민분들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난민옹호를 위한 연대를 모색해야하는 시민사회의 입장에서도 누구도 그렇게 책임을 주진 않았지만 여건상 맞닥뜨린 상황 속 과도한 책임감이 가볍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진전 없는 꽉막힌 현실과, 모색되지 않는 운동과 연대의 방향이 모든 게 제 탓 같이 느껴졌달까요.

언젠가 그렇게 느꼈는데 공무원분들의 영혼없는 처사를 보면, 사실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아도 되는 순간인데 꼭지가 돌아서 전화할 때마다 권한 없는 분들에게까지 화내고 다투고 - 내가 지금 누구에게 화를 내는거지? - 심지어 절박하게 찾아온 난민분들에게도 화를 낼 때가 있는 저를 보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환영하고 존재를 받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을 것을 보면서, 뉴스와 텍스트들이 저의 반응을 촉구하기 보다는 텍스트들의 무게가 저를 짓눌러 숨쉴수 없게 하면셔, 아 진짜 이렇게 일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일년간 쉴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9월에 날자를 받아놓고 남은 서면과, 급한 상담들, 인수인계 정리들을 하다가 이제 바로 다음주부터인데 사실 잘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연수원 마치고 10년동안 쉼없이 일을 하였는데, 지금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뭐하지?하고 떠올려보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네요.

생각해보면 우선 공백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고 어떤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생각만해도 사치지만 그런 시간이 제 헐벗음을 깨닫고 다시 방법을 찾게 할 것 같아요. 무엇을 할수 있을까요? 한달 동안 허리 끊어질 떄까지 잠자기, 여행? 어딘가 된다면 겨울이라면 북해도 어딘가에 틀어박혔다가 호호 불며 따뜻한 음식 먹기, 여름이라면 따뜻한 어디에서? 여름은 잘 생각나지 않네요 너무 더웠기 때문인가. 지금 일상에서 떨어져 어딘가 틀어박혀 잠시 지내기. 업무에 관계된 연락을 멈추고 잠시 단절된 삶을 가정에서 보내는 것 그렇게 충실하게 일상 속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고 좋겠어요. 동굴에 잠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헐벗은 상황 속 바닥을 두드리고 나면, 안해봤던 것도 해보고 싶어요. 10년넘게 손에서 놓은 음악에 대한 관심을 살려보려고 음악 작곡 툴들을 배워보기. 건조한 법률의 언어에 사실 지쳤기에 법이 할 수 없는, 선물할 수 없는 평화와 충만성은 예술에서 나올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언어논리 바깥에 있는 예술을 좀 배워보고 싶어요. 아 10년만에 게임도 해보고 싶다. 어디선가 동굴 같은 곳에 틀어박혀 최근 나왔다는 발더스 게이트3 일주일동안 깨보기.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체력도 떨어지고 더 할 생각도 없지만 일주일만이라면 게임도 해보고 싶어요. 던전과 드래곤의 세계로

도서관에 박혀 그간 못읽었던 책도 읽는 척하다가 몇페이지 안넘어가면 창밖을 보고 밖에 나가 멍때리는것도 해야겠어요. 헬스도 PT끊어 잠시 다녀볼까... 저는 막내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20년 이상 끊임없이 일해야되는데 지금 상태로는 바로.... 운동도 해야겠어요. 가족과 더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여행도 다니고 좋은 기억도 쌓아야겠죠. 제가 맛이 가게 10년을 보낸 만큼 그 짐을 아내와 가족들이 훨씬 많이 졌으니 고맙지만 미안합니다. 아이들에게 책도 읽어주고, 더 커나가기 전에 여러 추억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제 안식년은 저희 가정에게도 짐이 되면 안되고 모두의 안식년이어야 하니까.

일 년 이후도 준비해야겠죠? 사실 해외로 visiting scholar나 받아 갈까 생각하다가 아니면 맘먹고 난민법을 선도하는 영국 옥스퍼드나 호주로 석사를 받을까 하다 한국 안에 있기로 우선 방향을 잡은 후, 겨우 대학원 석사과정을 진학해 놓았어요. 사실 아무것도 안하는 1년을 보내는게 더 몸과 맘에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보내면 여태까지의 10년과 같은 형태로 10년을 더 일할 것 같아 뭔가 책임감을 갖고 다음 스텝을 밟으려면 너무 늦었지만 조금 더 채우고 단단한 활동을 하기 위해 공부를 좀해야할 것 같아요. 기회가 된다면 난민협약 교과서 한권 잡고 번역을 해볼까... 제가 무슨 논문을 쓰기보다는 그런 일을 해서 법원이나 공무원들이 참고할 자료를 만드는 게 한국 사회에 100배쯤 기여하는 일이 될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뭘할수 있을까 보겠습니다.

등록은 겨우겨우 했지만 일을 멈춘 9월부터 수업을 듣는다고 하니 사실 제가 솔직한 맘으로 대화도 잘 안되고 맛이 가 있는 상황에서 지금 수업을 바로 듣고 캠퍼스에 거니는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수업을 제대로 들을수는 있을지 다른 학생들에게 민폐만 될지 생각도 들고요.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잘 갈수나 있을까.

제가 견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서도, 다시 숨쉴 공간을 만들고 제 일과 활동, 방향에 대한 길을 잡아야할 것 같아요. 인격적으로 주님을 경험하고 제 자리를 찾아야겠죠. 저는 결국 난민들 옆에서 가능한 일을 하며 평생을 살겠지만, 10년을 돌아보고 자리매김을 다시 하고, 앞으로 다음 스텝은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는 생각해야겠지요.

동료분들에게, 그리고 제가 종국적인 답과 해결책을 받아내기 전까지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상황에서 따로 각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난민분들에게 미안한 맘이 크지만, 그 만큼 모두에게 더 든든한 기댈 곳이 될 수 있도록 더 힘을 내서 돌아오겠습니다. 두서 없지만 이렇게라도 알리면서, 어쩌면 여러분들의 너른 양해와 기다림을 여쭈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활동, 소식 많이 계속 귀기울여주시고, 1만원도 넘치도록 충분하고 감사하니 더 많은 옹호활동 이어갈 수 있도록 홈페이지 통해 정기후원으로 응원해주세요(댓글 링크). 더 많은 든든한 여러분들의 후원이 더 많은 난민들을, 실제로 구조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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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곳이 되어주시고 옹호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시는 후원자분들이 바로 난민들의 부당한 추방과 차별을 막고 한국 사회에서 평화로운 피난처를 일구어 나가도록 서는, 저희 활동의 숨쉴 공간과 한줄기 빛입니다. 저는 선물처럼 찾아온, 여러분들이 선물해주신 일년을 그만큼 소중하게 보내고 건강히 돌아오겠습니다. 잘 싸우기 위해 더 잘 호탕히 웃을 수 있는 유머를 장착하고.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 이일 작성)

최종수정일: 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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