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3년 4월] #39. 러시아 공항 난민신청자 사건 일지 - 이종찬 변호사

2023년 4월 7일

안녕하세요. 지난 가을 어필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이종찬 변호사, 제이입니다.
‘영광’은 과장이 아니며(대체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은혜’가 맞겠네요), ‘누린다’ 또한 수사가 아닙니다.
지난 10월 이래로,부족하고 약한 제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과 일을 마주하며 살고 있습니다. 

‘정의를 짓다’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정의를 짓’기 위해 제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는 기회 자체로 과분합니다. 그래서 ‘비틀거림’이 있을지언정 그 또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2022. 10. 어필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버리한 때에 줄리앙 이일 변호사님(두 명이 아니라 한 명입니다^^)의 연락을 받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갔습니다. “인천공항 출국대기실에 러시아 난민신청자들이 있는데, 난민인정심사에 불회부되어서 다투고 싶어 한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발표된 2022. 9. 러시아 부분동원령은 수십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본국을 탈출하는 행렬로 이어졌습니다. 그 중 일부는 동해상에 배를 타고 와 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필은 바다 위에서 이들을 만나 한국의 난민제도에 대해 알릴 수 있을지 알아보았는데, 이들의 신상 파악조차 어려운 현실의 벽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공항에도 비행기를 타고 온 러시아 난민신청자들이 있고 이들이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앞선 일로 덜 놀라긴 했지만, 놀랍게도, ‘단순 징집거부는 난민이 아니’라며 ‘난민심사의 기회조차 거부’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난민으로 인정 되지 않은 게 아니라, 난민심사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고요?

그렇게 10월의 어느 날 저는 이일 변호사님과 함께 인천공항 출국대기실에 들어가 러시아 난민신청자 3명을 만났습니다. 인천공항과 탑승게이트들이 있는 면세구역은 익숙하였지만, 그 공간 안에 ‘입국을 거부당한 외국인들이 잠시 대기하는’ 출국대기실이 있다니, 놀랍고 낯설었습니다. 낯선 공간에서 저는 누구보다 가장 낯설음을 당하게 된 3명의 러시아인을 만났습니다. 이들 위에 드리워진 ‘기약 없음’의 고통스런 그늘을, 그 때는 저도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요. “출입국이 여러분들에게 난민심사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소송으로 다투는 수밖에 없는데, 결론이 날 때까지 몇 개월 걸릴 수 있습니다. 아마 승소할 수 있을텐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2022년 10월에 시작된 소송은 2023. 2. 14.에 이르러서야 판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일부 패소한 신청자도 있었으나) 승소였습니다. 이들을 단순 징집거부로 단정하기 어려우며, 난민심사 기회를 주어 난민인지 여부를 판단받도록 하는 것이 맞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이었습니다. 이 자명한 판단을 받기까지 이들은 공항 안에 갇혀 5개월 가까운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그 사이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것이 이들을 버티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되기도 하였지만, 5개월의 시간과 자유와 바꾼 것은 ‘난민심사 기회 부여’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발견하는 마음으로 법원의 현명한 결정을 환영하였습니다.   

법무부는 그러나 그 결정을 환영하지 못했습니다. 법무부는 항소기간을 꽉 채워 2. 28. 이 패소판결에 항소하였습니다. 그 결과 승소한 신청자들은 영종도에 위치한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로 주거가 제한된 (그 외 항소심 확정시까지 난민인정 신청을 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기고 신청하면 보호소에 보호하겠다는 엄포 섞인 조건이 붙은) 조건부 입국허가를 받았습니다. 주거지를 제한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항소심에 응하자고 했습니다. “여기는 공항과 달라요. 법무부가 운영하는 시설이지만, 기숙사 같은 곳이어서 숙식이 잘 제공되고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저희도 만나러 올게요. 같이 외출하고 맛있는 것도 먹읍시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아쉽게도 저희의 외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인천에 위치한 러시아 식당을 알아보고 이들에게 줄 선물도 알아보던 저희는 센터로부터 ‘주거 제한 등 조건이 있기 때문에 외출은 허용되지 않는다. 매주 센터 거주 난민신청자들이 방문하는 시장에도 이들은 방문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거 제한을 외출 제한으로 적용하면서, 공항에서 수 개월 간 사실상의 구금을 겪은 이들을 또 다시 ‘장소만 바꿔서’ 구금하는 형태로 이어진 것입니다. 

법무부의 항소와 주거 및 외출 제한은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센터로 간 이들은 여전히 난민심사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채 공항에서와 유사한 심적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출국대기실에서 판결을 기다리던 다른 러시아 난민신청자1는 제3국에서 난민인정을 받는 게 차라리 나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결국 센터에 거주 중인 러시아 난민신청자 한 명은 며칠에 걸친 단식을 이어가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비틀거리며 짓는다는 정의’가 이런 걸 말하나 보다, 싶었습니다. 한국이 가입한 난민협약과 그 이행법률인 난민법을 선도적으로 도입한(도입하였다고 자랑하는) 이 나라에서, ‘난민심사 기회를 달라는’ 요구조차 이렇게 관철되기 어렵다니 말입니다. 이런 현실을 맞이하는 난민신청자 외국인들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런 비틀거림을 보기도 하고 겪기도 하는 와중이었지만, 2023. 3. 28. 저희는 인천과 제주에서 5건의 난민심사 불회부결정 취소소송 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남아 있던 러시아 난민신청자 2명, 말리 난민신청자 1명, 그리고 제주공항에서 같은 신세로 갇혀 있던 2명의 중국 난민신청자들에 대해 법원은 모두 ‘난민심사의 기회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며 저희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비틀거리는 나와 너를 잡고 다시 한 걸음 내딛어 보자는 용기도 함께 찾아 왔습니다. 5건의 승소 판결에 대해 법무부가 항소하면2 외국인지원센터로 주거/외출이 제한된 난민신청자가 앞으로 더 늘어날 텐데, 이렇게 요건도 기한도 없이 오로지 출입국의 재량에 맡겨진 ‘사실상의 구금이 반복되는 관행’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지난 금요일인 3. 31. 어필은 이 위법한 부담(조건)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잘못된 실무가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보자는 취지입니다. 

어필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전 어필의 후원자로 있을 때에는 “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이라는 표제가 사실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좌절이 찾아오기 쉬운 법률조력의 현장을 짧게 표현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나보다 짐작하는 정도였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 짧게 경험해보니 그 의미가 조금은 와닿는 것 같았습니다. 벽으로 놓인 현실이 있고 비틀거리는 너와 내가 있지만 한 걸음씩 내딛어 보는 마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걸 ‘정의를 짓는’ 것으로 보아 주신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도 한 걸음, 더디더라도 꾸준히, 조금씩 내딛어 보겠습니다.   


 1 작년 10월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3명이 하나의 사건으로 불회부결정 취소소송을 제기해 지난 2. 14. 그 중 2명이 승소하였고, 작년 11월에 입국한 2명이 각각 취소소송을 제기해 지난 3. 28. 모두 승소하였습니다. 

 2 이 글을 쓰는 2023. 4. 5. 현재 법무부는 아직 항소 여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지난 2건의 항소와 유사하게 항소기간을 모두 채우고 항소할 수도 있고, 어떤 이유로 항소를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유사한 사안에서 항소를 하며 조건부입국허가하였으므로, 같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최종수정일: 202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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