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3월] #52. 결국에 이기는 것 - 정신영 미국변호사

2024년 3월 9일

여성들의 사연을 처음 들은 것은 큰 아이가 돌을 지나 복직을 했을 때였습니다. 필리핀 여성들이 노동 착취와 성착취를 당하고 견디지 못해 업소에서 탈출을 하였으나 경찰에 단속이 되고 결국 외국인보호소에 구금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들이 외국인보호소에서 몹시 힘들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는 마침 자원봉사 신청을 하셨던 정신과 의사선생님을 모시고 외국인보호소를 찾아가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뉴스기사와 보고서에서 수없이 봤던 전형적인 인신매매 케이스였기 때문입니다. 연예흥행비자를 발급받아 가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 여성들이 정작 공연은 하지 못하고 노동착취와 성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미 국내의 시민단체와 여러 유엔 조약기구에서도 정부에 정책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의 권고와 현실은 제네바와 서울의 거리만큼 멀어서 일선에서 법을 집행하는 경찰과 출입국 공무원들은 여성들을 ‘성매매 피의자’ 즉 ‘잠재적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경찰은 여성들에게 수갑과 포승줄을 채우고 이송을 하고 수사를 하였는데 여성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이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큰 수치심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보호소에서 만났던 여성들은 몹시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업주가 그동안 했던 협박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업주는 “(경찰에) 신고를 하면 너희가 감옥을 간다”고 했던 말이 그대로 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경찰에게 업주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업주가 보호소까지 찾아오기도 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결국에는 두레방 선생님들과 변호사들과 함께 업주를 상대로 법적 절차를 진행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여성들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막연하게 ‘가수가 되고 싶어 한국에 온 사람’이라고 해서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것이 꿈인 젊은 사람들을 상상했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모두 고향에 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세 달 밖에 안된 아이를 두고 한국에 온 여성의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는 아이가 돌이 지난 뒤에야 아이를 기관에 보내고 복직을 했었는데 말도 못하는 아이를 원에 맡기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고, 또 제가 퇴근을 하면 바로 엄마 껌딱지가 되는 아이를 생각하면 늘 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달 밖에 안된 아이를 두고 근처로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라 다른 나라로 돈을 벌러 왔다니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을까 또 얼마나 아이가 눈 앞에 아른거릴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들은 한달 반 만에 외국인 보호소에서 풀려났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작은 선물을 보내면 좋겠다는 김종철 변호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필리핀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를 위한 원피스를 사서 보내드렸습니다. 이후로 김종철 변호사님과 전수연 변호사님, 그리고 공감 변호사님들까지 힘을 합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여성들의 사건을 진행했습니다. 업주를 상대로 성매매 강요, 인신매매와 상습 성추행 등으로 고소를 하였으나 업주는 성매매알선과 상습성추행죄로만 기소가 되었고, 기타 행정소송과 국가배상청구, 민사소송은 모두 기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넘게 국내에서 진행 중이던 모든 절차가 종료가 되어가던 중 한국 정부가 협약 상의 의무를 위반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에 대해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도 진정을 제기하였습니다. 김종철 변호사님이 안식년을 가시기 전, 어필의 자원봉사자였던 최호연씨와 함께 작성했던 진정서를 제가 이어 받아 마무리하여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업소에서 다른 여성들이 탈출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성들을 괴롭히는 수법은 보다 교묘하게 바뀌었고 업주는 보다 더 기세등등해졌습니다. 이번에도 어필의 동료들은 최선을 다해 여성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특히 전수연 변호사님은 이 사건을 위해 영혼을 탈탈 털었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애를 썼는데, 안식년을 가기 직전까지도 거짓말과 협박을 일삼는 업주와 기획사 사장들과 한 자리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지방의 검찰청을 오가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형사절차는 별 소득 없이 마무리가 되어버렸고 업주가 계속해서 여성들을 착취하면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니 나라에서 이주여성들 착취를 계속하라고 면죄부를 내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수연 변호사님이 진행하던 민사소송을 김주광 변호사님이 이어 받아 애를 써주셔서 최근에 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 말,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한 지 5년 만에, 한국 정부가 협약 상의 의무를 위반하였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위원회는 출입국 공무원 및 경찰이 이들을 인신매매 피해자로 확인하고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제퇴거 명령을 내리고 이들을 구금한 것, 법원에서 이들의 권리를 구제받지 못한 것이 행정청과 법원의 고정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며 젠더기반 차별로 인한 권리 침해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여성들에게 배상을 제공할 것과 관련 비자 제도의 개선 및 관련 법 개정 등을 권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유엔의 권고를 받는다고 해서 정부가 알아서 여성들에게 배상을 제공할 리는 없기 때문에 김종철 변호사님은 작년 말, 법원의 이전 판결에 대해 재심 청구를 하였습니다.

 

사실 재심을 청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성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여러 방법을 통해 싸워도 이기지 못했던 것이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울 수도 있을텐데 어떻게 다시 이 절차를 시작하려고 했을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그 때의 원피스가 떠올랐습니다. 여성들이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한국의 사법시스템에 대한 기대가 아닌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들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싸워온 동료들의 얼굴도 생각이 났습니다. 정의는 잠시 질 수 있지만 사랑은 질 수 없습니다. 정의가 지연되는 시간에도 사랑은 질 수 없기에, 이제 벌써 10살이 되었을 원피스의 주인공을 향한 사랑도 그 세월만큼 더 강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지지 않는 사랑에 기대어 가다가 결국에는 사랑도 정의도 이기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 날까지 동료들이 지치지 않도록 저도 곁에서 힘과 손을 보태고 싶습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정신영 작성)

최종수정일: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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