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살롱 드 어필 - 가자로 가는 항해

2025년 12월 11일

'배 타는 사람.'

해초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순간, 진로 때문에 갈팡질팡하던 시절 아버지께서 저에게 던지신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뭘 하고 싶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 특정한 직업 몇 가지를 읊었을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의 반응은 똑똑히 기억납니다. '동사로 답해. 네 삶이 그 직업일 수는 없는 거야. 네가 어떻게 살겠는지를 생각해봐.' 아버지와 이 대화를 나눈 것이 아주 오래전 일인데, 그 질문에 동사로 답하는 사람을 직접 본 것은 해초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동사로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태도가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해초님이 왜 가자로 향하는 여러 단체 중 'Thousand Madleens to Gaza (TMTG)' 선단의 일원이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TMTG는 구호품 전달을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자지구에 도착하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구호로 보기 때문입니다. 고립된 땅에 사는 고립된 사람을 만나러 가는 행위, 연결이 끊긴 세계에 몸을 던져 선 하나를 긋는 일 또한 분명 구호일 것입니다.

올가을, 해초님의 항해는 11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해초님이 탄 배는 가자 해안으로부터 약 120해리 떨어진 지점에서 나포되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었던 그 누구도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이들을 지켜준 유일한 방패는 실시간 트래커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항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지도상에서 하나의 점으로 표시되는 배가 수많은 시선 속에서 선(線)으로 이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생각해 보면 배를 타는 것 자체가 가 닿는 행위이고, 비록 이번 항해에서는 가자 해변에 닿지 못했지만 이 시도는 또 다른 시도들과 연결되고, 그 연결은 언젠가 도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배, 항해 기술, 국제 여론 등이 한데 모여서 실현된 것이겠지만,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사람이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다음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대체 무엇이 지금의 저 사람(해초님)을 만들었을까?' 그 답을 '대안적 삶'이라는 해초님의 말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정해진 궤도 위에 놓이지 않은 삶, 그렇기에 정해진 것이 없는 삶.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다음 발판을 찾아야 하는 삶이기에 더 큰 상상력이 요구되는 삶이었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오셨기에 해초님이 좀 더 큰 상상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해초님의 그 상상력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저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상상력일지라도 말입니다. 즉, 해초님이 더 큰 상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무수한 연결들, 즉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만나오셨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었던 저희보다 가자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가신 경험을 살롱 드 어필에서 나눠주신 해초님 덕분에 배에 타지 않았던 저희도 가자에 연결되어 가자라는 공간, 그곳에 사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초님이 말한 자신의 역할, 즉 '매개'가 무언가를 대신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타인의 상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연 후 이어진 대담에서 어떻게 유서까지 쓰고 배에 오를 수 있었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실 모두가 가장 궁금해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두 가지 의미로 읽혔는데, 하나는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 자체가 어떻게 가능했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 먼 가자의 일인데'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이 어떻게 가능했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상상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릇 인간은 생에 대한 욕구가 있는 존재이기에 완전히 이타적일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이타적으로 보이는 선택에도 그 이면 어딘가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부분이 반드시 있다고 봅니다. 그 말인즉슨,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은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의 자유와 해방이 해초님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겠지요. 저는 해초님의 상상력이 스스로의 자유와 해방을 팔레스타인의 자유와 해방과 연결 짓게 하고, 또한 자유와 해방이라는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하여 결국 해초님을 배에 오르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강연이 끝나갈 무렵, 제가 자주 들여다보는 이주·난민 이슈에서의 혐오가 떠올랐습니다. 그 또한 상상력의 문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다른 국적, 다른 인종,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의 일을 나의 일로 연결해 볼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할 때, 타인의 고통은 언제나 남의 문제로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초님의 항해는 물리적으로는 바다 위의 이동이었지만, 그 항해를 통해 보여주신 것은 그보다 훨씬 내밀한 이동, 즉 상상력의 이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자에 닿지 못한 항해. 그러나 그 이야기는 분명 어딘가에 가 닿았습니다. 적어도 강연장을 나설 때의 저는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김희진 변호사 작성)

최종수정일: 202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