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이주’와 ‘이주민’을 주제로 한 연극 ‘바다를 넘어온 나무’를 보고 왔습니다!

2024년 10월 25일

지난 10월 24일, 아르코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상영된 ‘바다를 넘어온 나무’를 어필이 관람하였습니다.

‘바다를 넘어온 나무’는 “일상에 대한 예민함과 시대에 대한 관찰로 감춰진 것을 들춰 내며, 독특한 주제 의식으로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는” 극단 놀땅의 신작으로, 최진아 연출가가 연출을 맡고 실제 이주민들이 배우로 연기하며 우리 사회의 이주와 이주민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고 질문을 던지는 실험작인 동시에 화제작입니다.

줄거리

‘바다를 넘어온 나무’는 전세 사기를 당해 이사온 은하와 은하가 사는 집 옥상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 파샤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은하는 자신이 이사온 집 옥상에 불법체류자 신세의 파샤가 사는 것을 불편해하고, 직장에서는 고려인 리나와 지속되는 불협화음을 겪습니다. 리나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유창하게 하며, 한국에서 석사까지 받았는데요. 그녀 또한 한국에서 정착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다시 은하와 파샤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파샤는 고장난 은하의 집을 수리해 줍니다. 이에 은하는 일시적으로 파샤에 대한 경계심을 푸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파샤와 공장 동료 알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은하는 혹여나 불법체류자 신분인 파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자는 친구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있는 파샤 편을 들어주는 등 파샤에 대해 마음을 여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역시 그녀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무지라는 색안경을 벗기란 힘들었을까요? 은하와 파샤 사이의 관계는 점점 안 좋아집니다. 극 중반에 은하는 고양이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며 옥상에 사는 사람을 한번 조사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넌지시 던지기도 하고, 옥상에서 큰 소리가 나자 여자가 맞고 있는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하기도 합니다. 아예 대놓고 파샤에게 “네가 싫어”, “잘 살려고 이사왔는데 네가 우리집 위층에 사는 게 싫어”, “생태교란종”이라고 하며 그에게 상처를 줍니다.

한편, 파샤는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 신세로 공장에서 일하는데, 직장 상사로부터 몽키스패너로 맞는 등 직장 폭력에 시달리고 임금체불을 당하는 등 힘든 생활을 이어갑니다. 파샤가 일하는 팀의 부장이 옆 공장에서 연기를 내보내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하자, 갑자기 출입국사무소 단속반이 들이닥쳐서 외국인 등록증 검사를 하는데, 이에 불법 체류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한가득 태운 버스가 도망치다가 사고가 나면서 극은 끝나게 됩니다.

‘이주’와 ‘이주민’에 대해

극초반에 뜬금없이 고양이는 수만 년 전에 아프리카 사막에서 기원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걸쳐, 아메리카까지 퍼졌다는 고양이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고양이 못지않게 이 극에 꾸준하게 등장하는 것은 바로 바다를 건너온 ‘씨앗’인데요. 이 씨앗을 담은 화분을 때로는 파샤와 공장 직원들이, 때로는 은하의 직장 동료이자 고려인인 리나가, 또 때로는 은하가 가지고 있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를 타고 도망가다가 사고가 난 공장 직원들의 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존재합니다.

이 극에서 고양이, 씨앗, 외국인 노동자들은 모두 이주민 또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떠나 이주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가 곧 씨앗이고 씨앗이 곧 외국인 노동자들인데요. 극 중 이들의 존재는 한없이 위태롭습니다. 고양이는 파샤의 옥상에 드나들며 파샤가 간간이 주는 사람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먹으며 (고양이는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 요로결석의 위험이 있다고 극 중 언급됨) 혹독한 야외 생존을 이어가다가 극의 중후반 죽은 상태로 발견됩니다. 바다를 건너온 씨앗(을 담은 화분) 또한 극 중 발붙일 곳 없이 하염없이 떠돌다가 등장인물들에 의해 엎어지고 쓸어 담기길 반복합니다.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은 경찰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에 의해 항상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임금체불과 직장 폭력에 시달립니다.

조만수 드라마터그는 “흩어져 새로운 땅에 심어지는 것은 비단 민들레 홀씨만은 아니다. 네 발 달린 동물은 물론, 돌도 나무도 그리고 사람도 멀리 흩어져 새로운 땅에 자리 잡는다”라고 하며 이 연극에 대한 자기 생각을 피력했는데요. 이처럼 고양이, 씨앗, 외국인 노동자들은 모두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와서 편견이나 무지, 또는 여러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새로 이주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이주민과 이주한 것들에 대한 메타포(metaphor)로 사용되었습니다.

돌의 시간에 대해

그렇다면 이 연극에서는 이러한 이주민 또는 이주한 것들 더 나아가 이주라는 전반적인 현상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요? 우선 극단 놀땅의 연극 포스터에 적힌 말을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돌도 땅도 움직인다. 어떤 것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더해져서 자연과 환경이 변화되고 사회가 구성되고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극 중에서는 돌은 돌만의 시간이 있다며, 돌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즉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돌도 땅도 그들만의 시간 속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그 움직임이 더해져서 결국엔 사회가 바뀌며,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만나는 곳에는 항상 낯선 것에 대한 경계, 불안, 적대심이 존재하지만, 결국에는 오랜 시간에 거쳐 이들이 모두 조화를 이루며 공존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메시지는 “씨앗은 화재가 나면 더 멀리 퍼져나가 뿌리를 내립니다”라는 극 중 마지막 대사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이주민과 이주한 것들이 낯설고 먼 곳에서 역경과 고난을 견디면 더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이 극 마지막 부분이 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어필은 굳게 믿고 싶습니다.

편견과 무지, 이중 잣대에 대해

이 극에서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과 무지, 이중 잣대에 대해 숨기지 않고 어김없이 들춰내는데요. 파샤가 은하의 집을 수리해 주자 은하의 친구들이 몰래카메라 탐지기를 가져와서 집을 수색하는 장면을 통해 이주민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외국인 또는 이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수리 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을 것이라는 이러한 친구들의 색안경을 낀 억측에 은하의 친구 중 한 명은 자신이 보스턴에서 소수인종으로 산 경험을 얘기해주면서 반발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어떤 특정한 상황에 가면 다수가 될 수도 또 다른 특정한 상황에 가면 소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요.

은하의 보스턴 출신 친구가 다른 친구들의 억측에 반발하는 이 장면은 파샤가 노골적으로 자신이 싫다는 은하에게 내가 당신에게 대체 무엇을 했느냐며 항변하는 모습과도 무척 닮았는데요. 파샤는 은하에게 방글라데시 말로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앗살라무 알라이쿰’이 무슨 의미인지 말해줍니다. 이 순간에도 은하는 앗살라무 알라이쿰은 아랍 국가에서나 쓰는 인사말이 아니냐며 파샤가 온 방글라데시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파샤는 은하에게 ‘앗살라무 알라이쿰’은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안전하길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자신은 은하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은하는 파샤라는 본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존재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편견과 무지로 대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슬픈 장면입니다.

서로 다른 이주민들을 대할 때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중 잣대 또한 이 연극에서는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극 중 등장인물들은 파샤와 공장 외국인 노동자들을 “까만 외국인”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종종 하대하고, 잠재적인 범죄자로 몰아가길 십상입니다. 반면에 은하의 직장 동료 리사의 백인 지인을 보고는 “하얀 외국인”이라고 부르며 관심을 가지고 호감을 표시합니다. 또한 고양이도 이주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은하는 ‘이주한 것’인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습니다. 파샤가 먹다 남긴 음식을 고양이에게 주자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 고양이들은 요로결석에 걸린다며 파샤를 강하게 다그치고, 고양이가 죽자 슬퍼하는 등 고양이를 애지중지합니다. 결국 고양이도, “까만 외국인”도 “하얀 외국인”도 모두 이주민이고 이주를 해온 존재들입니다. 이들을 대하는 극 중 등장인물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통해 이 극은 같지만, 서로 다른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를 신랄하게 드러냅니다.

클로징멘트

이렇듯 ‘이주’와 ‘이주민’을 주제로 한 연극 ‘바다를 넘어온 나무’를 인상깊게 보고 왔습니다. 어필은 오늘도 이주와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편견과 무지, 그리고 이중 잣대가 없어지기를 기도하며, 이 땅에 발붙이기 힘든 이주민들에게 ‘앗살라무 알라이쿰’이라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27기 인턴 이상준 작성)

최종수정일: 2024.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