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는 삶을 지켜본 6개월
Audemus jura nostra defendere
(“We Dare To Defend Our Rights”)
– the state motto of Alabama
소년들은 으레 소중하고 올바른 것들을 지키고 싶다는 로망을 품기 마련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라서 어렸을 적부터 법도와 명예를 지키는 기사들에 대한 동경을 품은 나머지 영문과에 들어오자마자 아서왕의 기사들과 샤를마뉴의 용사들의 활약상을 읽는데 매진한 바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보다는 지키는 그들의 검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 훨씬 중요한 문제임은 페이퍼 작성을 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고도서들을 잔뜩 읽은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마상 창 시합과 결투가 없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이 세상은 그저 평화롭고 안락하기만 하다고 다 함께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실상은 오늘날이야말로 설령 과정은 중세 때보다 평화로울지언정 결과는 그 시대 못지않게 파괴적인 법정 싸움이 도처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성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에서 그 싸움의 파편이 튀어 대학까지 날아 들어온 것들 일부를 접한 바는 있었으나 그 전모, 그 현실, 그 차가운 날것의 진실을 직접 대면해보지는 못했었습니다.
어느덧 4학년이 되자 존재하는 줄 알면서도 외면했던 진실을 계속 인식 저 너머에 둔 채로 졸업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턴 근무할 곳을 찾던 와중에 어필을 알게 되어 어필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지향 철학에 기대어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그 내용에 대해 제가 헤매가며 한참 동안 설명해도 질려하지 않고 전부 들어주신 상근 변호사님들의 따스한 첫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설령 떨어진다 해도 이 경험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각오했었는데, 다행히 합격하여 어필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날것의 진실과 조우하고 싶다는 소망이 이뤄지길 바라긴 했지만 불과 2주 만에 이루어지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2012년 4월 4일자 제 페이스북 상태 글입니다.
나는 원래 내일 오전에,
지난 30여일 동안 불의에 항거하여 단식해 오던 한 남자의 고초를
어쩌면 끝내줄 수도 있었을 서류를 제출하러 의정부지방법원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도 지난 월요일에 강제송환 당했다고 한다.
만사휴의다, 의정부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지난 3월 19일에 공익법센터 어필로 첫 출근했다.
2주 동안, 내가 아는 난민희망자만 벌써 2명이 강제송환 되었다.
1주일에 한 명 씩, 모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대공의 한 복판에서, 한 인간의 미래가 조각나 흐드러진다.
1주일에 한 명 씩, 지키지 못 한다.
하지만 다행히 이후 강제송환 당한 분들 가운데 한 분이 비록 구금당한 처지긴 하지만 살아 계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그 이후에야 어필 식구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마냥 슬퍼하기만 할 새도 없이 우즈베키스탄 면화 이슈뿐만 아니라 미얀마의 기만적인 민주화와 지속되는 소수민족 탄압 문제, 경계 속에서 죽어가는 방글라데시 로힝기야 무슬림 문제, 우리 한국 땅에서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취약한 이주민들이 직면한 문제 등 세계 곳곳의 문제들과 마주했고, 그 문제들은 모두 저마다의 강자와 약자를 품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강포한 자들이 부당한 목적을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무고한 약자들을 억압할 때 인권 유린, 자연 파괴, 그리고 억압구조의 유지를 위한 메타 억압, 이에 대한 제3자들의 외면이 함께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미얀마 북부 카친 족이 처했던 비극은 저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게 하였습니다. 2011년 4월 22일자 상태 글입니다.
사람 시체를 보거나 핏자국을 보거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게 두려워서 의대, 의전, 치전 등은 내겐 안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적성 자체도 아무래도 이과보단 문과 쪽에 훨씬 잘 맞기도 했고.
그런데 오늘 Partners Relief & Development의 Crimes in Northern Burma Nov 2011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이 인위적인 강압에 의해 맞이할 수 있는 참혹한 죽음의 경우의 수를 거의 다 본 것 같다. 매스를 집든, 책을 펼쳐들든, 인간이 인간을 구하려면 피, 상처, 시체로부턴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것 같다. 하얀 옷이 피에 젖는 와중에 열심히 상처들을 들여다보며, 무고하게 급사한 망자가 남긴 유일한 언어인 몸뚱이에 새겨진 모든 것들을 읽어낼 책무.
여러 참상들을 실제로 접하는 것을 통해 저는 비로소 이 세상엔 이토록 지켜야만 할 게 많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필이 하는 일은, 어필의 상근변호사님들이 하시는 일들은 바로 ‘무고한 약자들을 지키며 공의로운 평화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일’들임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면접 대비할 때 ‘어필의 사명’을 어필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보고 살짝 암기하다시피 했었지만 실제로 지켜내는 삶을 지켜보면서 그 실상을 느끼고 진정한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켜낸다는 것은 약자를 보호한다는 의미를 일차적으로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의미도 지닙니다. 억압자에 맞선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인 난민들을 돕는 활동은 이따금 외국인을 혐오하는 한국 분들의 맹렬한 질타를 받곤 합니다. 한국인 억압자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법정에서 난민 및 취약한 이주자 분들의 편에 서는 것을 매국행위로 매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다음은 6월 21일자 제 페이스북 상태 글입니다.
오늘 우리 사무실에 다소 격앙된 어조로 상당히 공격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의 한 전화가 걸려왔다. ‘시사인 기사 보고 전화한 일반 시민입니다! 김종철 변호사랑 통화할 수 있어요?!’ ‘[송 변호사님] 아.. 지금 자리를 비우셨는데 30분에 들어오실 거예요..’ ‘지금이 2시 20분인데 그럼 그 짧은 시간만 기다렸다가 전화하면 받는다는 거죠?!’ ‘아.. 네..’ ‘난민 관련 글 좀 쓰셨더라고요?’ ‘네..’
나를 위시한 나머지 사무실 분들은 그냥 각자 업무하고 있다가 일동 잠시 패닉;; 우리나라도 국제화가 가속되는 와중에 외국인 혐오도 엄청나게 늘고 있다던데, 음, 이렇게 항의전화도 받을 정도로 단체가 네임드가 되는 것도 물론 나름대로 의의가 있긴 하겠다마는, <칼의 노래>가 생각난다. 일본 왜병들의 총칼이 무서운 게 아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했으니, 안으로부터의 위협이 실은 가장 대비하거나 대응하기 힘들기 마련이라서, 오늘날 난민 지원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마치 삼도수군통제사가 왕의 검을 피하기 위해 불철주야 조심했듯이, 한국 국민들의 ‘단죄’를 피하기 위해 매사에 조심을 기울여야 하는, 실로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좋은 일을 하면서 위로부터의 위협도 모자라 아래와 안으로부터의 위협도 받는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화를 무척 신사적으로 받으시며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신 김종철 변호사님을 지켜보며 강인한 품성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난민 분들과 취약한 이주민 분들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 분들을 지키는 바로 이 어필의 식구 분들과 같은 활동가 분들을 지키는 기사들과 그를 위한 제도도 분명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일본의 경우처럼 국제화에 있어서 지나치게 늦지 않게, 반드시 진정한 의미의 국제의식이 시민들 사이에 뿌리내리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큰일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김 변호사님과 함께 양천구청역 근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들렀다가 바로 인천공항으로 택시타고 직행하여 공항에서 금방이라도 강제퇴거당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한 난민지위신청희망자 분을 위해 난민신청을 대리했던 경험입니다. 다음은 7월 29일자 제 페이스북 상태 글입니다.
난민 분을 위해 내가 쓴 의견서와 다른 난민 분들의 난민신청서류, 그리고 공항에 잡혀 있는 한 소년 난민의 난민신청대리접수를 하기 위해 안국역에서 목동 양천구청역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김 변호사님께서 소년 난민을 위해 장시간 동안 고군분투하셨으나 결국 돌아온 답은 ‘인천공항 소관’이라는 짧지만 중후한 울림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었기에 김 변호사님은 망설임 없이 목동에서 바로 택시를 타셨고, 나도 얼떨결에 합승해서 인천공항으로 달리게 되었다. 양천구청역에서 저 답변을 얻는 데에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긴 했으나, 공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더 오래 걸렸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처음 직면한 반응도 ‘이건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였기에, 목동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안 들렀다 갔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4시 전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6시가 되도록 우리의 쟁점은 ‘서류를 접수 하느냐 마느냐’였다. 그러니까, 재심과 분들은 이 난민신청 서류의 접수 그 자체를 하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면서 6시 반이 넘을 때까지 떠나지 않자 마침내 ‘사물함에 넣어두고 가시라’는 답변이 왔다. 하지만 정식 서류접수가 아닌 절차이기에 이후 혹여 송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접수를 시도하였음을 입증할 방도가 없을 우려가 매우 컸다. 하지만 끝까지 이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었던 까닭에 우리는 선량한 인상의 공항 출입국사무소 직원 분께 신신당부하고서 이미 7시 반도 넘어서야 공항에서 서울로 출발할 수 있었다. 같은 한국 사람들, 그 중에서도 변호사가 이렇게나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데, 난민 분들의 경우엔 꼼짝없이 공무원 분들이 뜻하는 바에 따라 처분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카데미아에만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아무래도 정글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사회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으로 하여금 정글이게 하는 면모들을 공개하지 않고 은닉하고 있음으로 보인다.
이후 8월 한 달 동안은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떠나는 분들을 송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인턴 근무 마지막 날, 그 동안의 제 모습이 담긴 앨범을 받아들었을 땐 자칫 잘못했으면 대학 졸업반이면서도 울 뻔했을 정도로 크나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필에서 보낸 6개월, 지키는 삶을 지켜본 반년의 세월을 통해 제가 앞으로 살아갈 방향성과 그 의미도 보다 명확하게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관련 글
- 2013년 8월 6일
- 2013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