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8일, 32살 청년 강태완님이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태완님의 짧은 삶은 한국에서 ‘체류자격’이 없는 아동으로 그리고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태완님의 이야기는 <있지만 없는 아이들>에 실린 태완님의 어머니 인터뷰를 통해 그리고 한겨레 기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었고, 또 선원이주노동자 인권네트워크에서 함께 활동하는 이주와인권 연구소의 박사님들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체류자격이 없어 잘못을 하면 바로 추방이 될 수 있으니 아무런 잘못을 해서는 안되기에 유령처럼 살던 시절을 지나, 외국인등록증을 받은 뒤 자신의 이름으로 핸드폰을 개통하고, 건강보험에 가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드디어 온전한 사람으로 현재를 살게되고 미래도 꿈꿀 수 있게 되어 기뻐했던 그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봤기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늘 어머니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살려면 화나는 일이 있어도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기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늘 참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태완님을 좌절시켰던 것은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무력감에 빠져 살아가던 그의 곁에서 활동가들은 제도의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시도와 또 제도를 바꾸기 위한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태완님은 말도 통하지 않는 모국으로 자진 출국을 하고, 유학비자를 받아서 체류자격을 받고, 이후에는 인구감소 지역에서 5년 이상 거주하면 거주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지역특화형 비자를 받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태완님이 자신의 이름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 애쓴 흔적은 다른 미등록이주아동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어려워도 태완님처럼 결국에는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았습니다. 태완님은 입사 후 8개월 만에 10t짜리 무인 건설장비와 고소작업 차량 사이에 끼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태완님이 떠난 뒤, 태완님의 유가족인 어머니와 그를 가까이서 돕던 활동가들은 회사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사고 원인 규명, 재발 방지 대책 수립 과정에 유족 대리인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 측에서는 안전 수칙 위반과 기기 문제 등을 부인하고 현장 조사의 유족 참여 보장과 민사 소송 제기 등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에 회사에 책임을 묻기 위해 유족들은 12월초부터 회사 앞에서 규탄 시위를 진행하고 있으며, 12월 5일에는 규탄집회와 함께 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어필에서도 정신영, 윤이나, 김민지, 이상준, 손연우 5명이 함께 참가를 하였습니다.
집회에는 태완님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전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정당과 노조에서 참가하여 연대의 마음을 전하였고, 그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참여한 이주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아까운 청년의 죽음에 무책임한 태도로 대응하는 회사에 분개하며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회사에 책임을 묻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집회 중 무대 뒤로는 철새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계속 보였는데 체류자격에 메여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는 땅 위의 사람들의 삶과 대비가 되어 서글픔을 더해졌습니다.
규탄 집회 이후에는 태완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원광대병원 장례문화원에서 모여 태완님을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태완님의 어머니가 그간의 심정과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처음에 소식을 듣고 그냥 미쳐서 생을 끝내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태완님의 죽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아 시신이 안치된 병원 앞을 오가며 많이 우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태완님을 위해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또 규탄 집회와 추모제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을 보고는 힘이 나서 끝까지 싸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열을 했는데 울다 지친 어머님의 몫을 우리가 함께 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저녁 후에는 익산 유스호스텔에서 태완님의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태완님을 기억하기 위해 유족들은 어렸을 적 사진, 입사 후 입던 유니폼 그리고 학교에서 받은 상장 등을 전시를 해 놓았는데 아들의 상장과 사진을 예쁜 액자에 넣어 정성스럽게 간직해왔을 어머님의 마음이 전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추모제에서는 태완님의 가족, 전국의 이주활동가들, 전북 지역에서 연대하는 노조와 정당, 지역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 태완님을 오래 취재해온 기자님, 1029 참사 유가족, 연구자들도 참가를 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추모제에 참석한 이들은 한결같이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태완님을 지켜주지 못해서, 태완님을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몰랐어서, 김제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어른으로서 태완님에게,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울음이 터져 나왔고 두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눈물이 마를 새가 없이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태완님의 죽음은 이들의 탓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 곁을 지켜온 사람들은 미안해 하는 반면,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관심도 없이 일을 덮기에만 급급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담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 일을 하며 배운 것은 희망은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럴듯한 대책도, 돈 있는 사람들이 선심 쓰듯이 쓰는 돈도 아닌, 힘도 없고 돈도 없지만 서로를 붙잡고 같이 우는 사람들의 눈물에 있다는 것입니다. 연대의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던 착한 사람들의 얼굴과 눈물을 기억하며, 태완님의 유가족이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고용노동부는 청년 강태완님의 산재사고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죽음에 책임 있는 사람을 처벌하고, 회사는 지체 없이 유족과의 합의에 임해야 합니다. 법무부는 수많은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들의 체류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태완님과 그의 뒷모습을 지켜봐 온,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은 서로의 눈물에서 힘을 얻어 멈추지 않고 연대할 것입니다.
(정신영 변호사 작성)
<2024년 12월 18일 추가>
많은 분들의 연대의 결과, 2024년 12월 10일, 회사는 유족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여 합의가 이루어졌고, 12월 14일부터 12월 16일에는 태완님의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주와인권 연구소의 소식과 한겨레 기사를 참고해주세요. 관심 가져주시고 마음 모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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