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유엔 포럼 끝의 버섯 - 제13회 유엔 기업과인권 포럼 참가기

2024년 12월 3일

지난 11월 25일부터 27일, 제13회 유엔 기업과인권 포럼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유엔 기업과인권 포럼은 유엔 기업과인권 이행원칙(UNGP)의 이행을 위한 과제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때문에 포럼에는 유엔의 다른 인권메커니즘과는 UNGP 이행의 주체로서 기업도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참가를 통해 다른 이해관계자와 ‘건설적인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 의도였을 수 있겠으나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포럼에서는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 특정 기업에 대한 문제제기를 지양하도록 안내가 되고 있어 애드보커시를 위한 자리로 활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고, 다른 유엔 인권 메커니즘 절차와 달리 포럼을 통해 구체적이고 강력한 권고가 도출되기 보다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논의가 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참가의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네바에서 열리기 때문에 비용 면에서도 부담이 되어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참가하기 어려운 행사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대만, 일본의 동아시아의 단체들과 함께 만든 보고서를 발표를 하면서 포럼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과 유럽에도 동아시아의 활동을 가시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하여 기업과인권 네트워크의 동료들과 함께 포럼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유엔 앞, 부러진 의자 앞에서 기업과인권 네트워크 멤버들 (왼쪽부터 양현준 변호사, 신유정 변호사, 정신영 변호사, 강미솔 변호사)

포럼 참가의 준비는 사실 작년 동아시아 기업과인권 워크샵이 끝난 이후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워크샵에 참여했던 일본의 Human Rights Now와 대만의 Environmental Rights Foundation, 그리고 한국의 기업과인권 네트워크에서는 워크샵에서 논의된 사례들을 모아 동아시아에서도 기업의 인권환경 침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율규제가 아닌 법을 통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 보고서를 언제 어떻게 발표할 지를 고민하던 중, 유엔에서 열리는 기업과인권 포럼에서 발표를 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처음에는 포럼의 공식 세션 중 하나로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안서를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럼 세션의 구성은 지역별(라틴아메리카, 아시아-태평양, 아프리카 등) 세션이 아닌 이상,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섹터 그리고 젠더의 비율이 균형을 맞추어 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동아시아라는 너무 좁은 지역에 대한 내용만으로 한 세션을 구성하기는 어렵다고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동아시아가 좁은 지역이라는 이유를 듣고는 유럽과 미대륙이 아닌 지역을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버리는 분류란 대체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인가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기획했던 내용이 포럼의 공식 세션으로 채택이 이루어지지 않자 언제 어디서 행사를 개최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포럼의 공식 스케줄이 있는 시간에는 행사를 개최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단체에서는 아침 7시 45분부터 시작하는 조찬 모임이나 저녁 6시 30분 부터 시작하는 저녁 모임을 진행하기도 했으나 저희는 안정적으로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행사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엔 빌딩 내부는 공사 중이기도 하고 너무 많은 대여 요청으로 인해 방을 대여해줄 수 없다고 들어 고민하던 중, 유엔 부지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소요가 되는 건물의 회의실을 대여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사실 가보지 않은 장소에서, 그것도 외국에서 행사를 준비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는데 다행히 Human Rights Now에서 제네바에 상주하고 있는 스탭이 있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럽, 더 좁게는 제네바에 기반을 두지 않은 단체들이 유엔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 겹겹이 존재하는 장애물은 유엔에서 이루어지는 인권 논의가 세계의 인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접근가능한 이들의 시각에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단체들이 함께 발행한 보고서 - 116페이지로 무게가 꽤 나갔는데 한국에서 제네바까지 나르느라 기업과인권 네트워크 동료들이 많은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행사에 사람들이 많이 올 것인가도 걱정되는 부분이었는데 유엔 포럼에서는 주로 UNDP나 EU 차원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부대행사로 소개하고, 작은 단체들의 행사에 대해서는 전혀 안내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유럽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포럼 참가자를 대상으로 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유엔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줄을 한참을 섰다가 들어가야했기 때문에 유엔 빌딩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점심 시간에 일부러 멀리 나올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참가자들을 기다렸는데 다행히도 다양한 분들이 행사장을 찾아주었습니다. 행사에서는 작년 대만 워크샵 이후로 1년 동안 각 나라에서 많은 일들이 진행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그 사이 유엔 기업과인권 실무그룹이 일본 방문 보고서를 인권이사회에서 발표를 하며 인권환경실사법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진 상황이었으며, 대만에서는 인권환경실사법 제정에 대해 시민사회의 의견이 모아져 법안 초안까지 마련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작년에 발의한 법안은 폐기되었으나 새로운 국회에서 다시 법안을 발의하기위해 개정 작업을 지난 1년 동안 진행하였고, 법안을 더 넓은 시민사회에 알리기 위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공유하였습니다. 행사에는 동아시아 단체 외에도 유럽에서 공급망실사법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해온 유럽기업정의연대(European Coalition for Corporate Justice, ECCJ)의 디렉터인 Nele Meyer와 유엔 기업과인권 실무그룹 멤버인 Pichamon Yeophantong이 참석하여 인권환경실사법이 UNGP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고, 집행수단을 확보를 통해 실효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No mHREDD, No Smart Mix – Developing Effective Legal Frameworks in East Asia 행사 장면

또한 포럼에서는 평소에 직접 만나기 어려웠던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포럼이 진행되는 회의실 바깥 복도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여러 단체에서 준비한 자료를 배포할 수 있도록 하여 한국에서 준비해간 보고서도 배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포럼 외에 행사를 준비하고 여러 미팅에 참여하느라 막상 공식 세션의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집중하지는 못하였지만 유엔 기업과인권 실무그룹에서 주관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기업과인권에 관한 NAP(National Action Plan)가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한 세션에 패널로 참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UNGP 이행을 위해 법이 제정되고 있는 유럽과는 달리 아시아에서는 이제 막 NAP가 도입되고 있는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리소스 부족과 인식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였고, 일본에서는 패널로 참가한 대형 은행의 CSO(Chief Sustainability Officer)가 일본 기업과인권 NAP 제정 과정에서 이해관계자 그룹으로 참여한 경험을 공유하며 이해관계자 참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는 정확히 시민사회와 당사자 그룹에서도 느끼는 지점인데 기업에서도 이런 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탑다운으로 정책을 만드는데 익숙한 정부의 한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NAP가 효과적인 정책의 틀로 작동하지 못했던 것은 이해관계자 참여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과 이행을 담보할 기제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환경문제에 대해 기업이 책임지도록 하는 정책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법이 만들어질 경우에도 이해관계자 참여를 보장하고 공급망의 인권환경문제에 대해 기업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포럼의 공식 세션에서는 정부, 인권위, 시민사회, 당사자 그리고 기업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섹터’의 패널이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기 때문에 메시지가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업에서는 실제로 문제가 되었던 사례에 대해 어떻게 대응을 했는지 보다는 자신들이 만든 정책이나 ‘인권실사’와 관련된 사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런 정책들이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지는 사업에 영향을 받은 당사자들을 통해 확인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포럼에서는 시민사회와 기업활동에 영향을 받은 당사자의 발언이 형식적으로 보장되고 있고, 무엇보다 패널 발제 후 플로어에서 이루어지는 활발한 문제제기를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발언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가령 AI 관련 세션에 참가한 기업에서는 AI 윤리 가이드라인에 대한 설명을 하였으나 플로어에서는 전쟁에서 사용되고 있는 AI 기술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은 없는지, AI 도입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이 일을 잃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 AI 학습과정에서 사용되는 데이터의 출처가 윤리적으로 확보되고 있는지, AI를 활용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에 대한 대책은 있는 것인지 등의 질문이 이루어졌고, 기업의 가이드라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점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회의장 만큼 북적였던 유엔 빌딩의 카페테리아 - 바깥의 정원.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럼 이후 국내 뉴스에는 국내 기업에서 포럼에 참여한 내용을 보도자료로 배포한 내용이 여럿 보도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만약 유엔 포럼에서의 논의가 다양한 이해관계자, 특히나 사업 활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진 채 기업이 자신들의 정책을 자랑하는 것에 그친다면 포럼은 위장 인권주의(rightswashing)의 플랫폼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오랫동안 동아시아 동료들과 준비한 행사는 어디에도 보도되지 않고 각 단체의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던 차에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산책을 하다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는 인류학자 애나 칭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애나 칭은 <세계 끝의 버섯>에서 인공적으로 재배할 수 없는, 인간이 망가뜨린 숲에서만 자라는 송이버섯에 주목하는데 송이버섯이 바위와 이끼와 뿌리와 균사와의 공생을 통해 자신도 살고, 숲도 살리고, 고향에서 그리고 피난을 온 주류 사회에서도 내몰린 난민들도 살리는 멋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애나 칭은 이 이야기가 송이 버섯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며 인간의 통제 받지 않은 채, 엉망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생존하는 버섯을 알아차리는 것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상상의 문을 열어갈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할 뿐입니다. 거대한 국제기구와 정부, 대기업, 언론은 아름다운 약속이 세계를 구원할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은 세상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엔의 공식 세션에도 포함되지 않고, 주요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송이버섯과 같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결국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상상력을 열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송이버섯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밝은 눈일텐데, 밝은 눈을 가진 이들과 찬찬히 주변을 살피기를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정신영 변호사 작성)

일본, 대만, 그리고 기업과인권 네트워크의 밝은 눈을 가진 동료들과 행사장 앞의 멋진 그림 앞에서.
최종수정일: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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