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파시즘 속으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 인종주의란
점차 상식이, 그리고 소통과 토론도 사라져가고 있음을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살벌한 언어가 난무하고 최소한의 정치적 마지노선을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총력을 다해야만 할 것 같은 작금의 대한민국의 삭막한 상황에서, ‘다양성의 긍정’이란 소중한 가치는 점차 후순위로 밀리고 이를 긍정할 공간이 점차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파시즘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날의 한국사회 역시 다양한 위기들에 직면해 있다.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경제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삶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격고 있으며, 이민자들은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민주주의는 후퇴중이고, 계급적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 사회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의 크기는 개개인들이 감당할 수 있을 크기를 벗어난 지 오래고, 개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고통에 대한 역반응들을 산출해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과 광장을 뒤덮는 단죄와 심판의 언어들은 우리사회가 간절하게 “적”을 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공론의 장에서의 끝임 없는 토론이라는 모델은 우리편과 적을 명확하게 가르고자 하는 욕망으로 대체되었고, 그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논의는 내부의 적으로 간주되어 적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각각의 세력들이 각각의 기준으로 그어놓은 선은 모두 자신이야말로 마지노선이라고 주장하며 한발자국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도덕과 비도덕, 상식과 비상식, 정의와 불의 같은 서슬 퍼런 카테고리들이 정치의 언어를 장악하고 있다.
– “Road to Fascism : 새로운 파시즘의 징후들 – 쿠르세” 중 발췌 (http://blog.ohmynews.com/litmus/177824) |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 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작업만이 넘쳐나며, 경계에 서있는 사람들, 내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정치적 지분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편으로 동화되든지, 상대 편이 되어 내 적(敵)이 되는 걸 감수하든지’의 선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 일반에서 도저히 ‘내 편’으로 간주되지 않는 이주민들은 점차 논의의 장의 경계로, 그리고 새로운 파시즘적 맥락에서 적(敵)으로 상정되는 공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종주의는 현재 한국에서 우리편과 적(敵)을 구분하는 구별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이주민의 날을 기념하여 인종주의에 맞설 방법을 고민하다
1990년 UN총회에서 ‘모든 이주노동자와 가족의 권리보호에 대한 국제협약’이 채택된 것을 계기로 매해 12월 18일은 ‘UN 세계이주민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세계이주민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 중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주최로 <한국사회 인종차별에 맞서다-한국과 일본의 인종차별 현황과 대책>이란 주제의 토론회가 12월 17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렸습니다. 인종차별철폐협약의 비준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 문제는 전혀 사회적 의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제정 마저 점차 요원해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 같은 토론회가 만들어낼 전망은 사실 결코 밝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소중합니다.
한국사회, 인종차별에 맞서다
오늘 토론회의 제목은 “한국사회, 인종차별에 맞서다”였습니다. 인종차별이란 주제 자체에 대하여 심도있게 토론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국의 인종차별문제를 극복해낼 것인가’라는 전략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했던 취지였습니다. 이에 한국에서 인종주의 문제를 논의하는 대표적인 전문가분들이 참여해 주셨고, 재일조선인 문제들을 다루며 Hate speech문제와 싸우고 계신 코리아 NGO센터의 재일조선인 3세 곽진웅 대표님도 오셨습니다.
두 꼭지로 나눠진 토론회의 첫 번째 마당에서는 이재산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님의 사회로 ‘정혜실 TAW(터) 네트워크 대표’께서 ‘한국사회 일상적인 인종편견과 인종혐오주의의 세력화’를, 민변 소수자인권위 소속 ‘정소연’변호사님께서 ‘인종차별 금지의 법제화’를 발표해주셨고, 참여연대 국제위원회 양영미 위원장님과, 천주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박진균 사무국장님께서 토론을 맡아주셨습니다.
저는 두 번째 마당부터 방청을 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박경태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님의 사회로, ‘곽진웅 코리아 NGO 대표’께서 ‘일본의 인종차별 상황과 시민사회의 대응’,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께서 ‘인종차별 철폐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발표해주시고,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님과 김미선 한국이주민건강협회 상임이사님께서 토론을 맡아주셨습니다.
재일중국인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문제로 주로 집약되어 있는 일본의 인종차별 문제와 이에 대한 대응들의 논의는 시간관계상 자세한 발제가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최근의 재특회가 교토조선학교에서 학생들에 대하여 한 인종차별적 시위가 헌법상의 교육권, 인격권, 세계인권선언, 소위 사회권규약, 소위 자유권규약을 위배하였기에 일본 민법 709조의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며 1,226만엔이라는 고액의 손해배상을 명한 교토지방법원의 선도적인 판결의 소개가 인상깊었습니다. 물론 이미 한국에서도 많이 소개된 판결이지만, 그 내용이 법리상 한국에서도 충분히 적용가능하겠다는 통찰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종주의를 언어화 하기’라는 부제의 두 번째 발제는 현재의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인종주의가 서있는 맥락을 드러내주는 이론적 강의였는데, ‘인종주의를 거론하기 힘든 현재의 한국에서 1)민주주의의 확장체로서 인종차별반대운동 – 민주주의국가란 ‘국민’ 뿐 아니라 ‘비국민’의 권리도 인정하는 국가란 지적 , 2)이주자 문화권 확보 – 이주자들이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적 통로를 갖게 해줘야한다는 지적, 3) 복합차별에 대한 인식 – 인종을,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국적, 지역성보다 상위의 포괄적 개념으로 상정하여 전략을 짜면 안된다는 지적’등이 인상 깊었습니다.
지금 과연 맞설수 있는가의 고민 앞에서
전체적으로 토론회 방청을 마치고 나오면서는, 지금 과연 인종주의에 대해 맞선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고민은 남았습니다. 인종주의 담론 자체가 전혀 사회적 의제가 되어 있지 않고, 수많은 대화, 구조, 사회적 관계가 인종주의, 인종차별적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그렇다고, ‘인종차별적’이라고 불리워지지 않는 현실에서 선도적인 대응 전략을 과연 논의할 수 있는 단계인가에 주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단계에서 제운동 단체들의 사회적 역량, 현 시점의 정치적 조건, 운동의 명확한 지점 설정의 어려움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 배우고 연구하고, 부지런히 알려나가는 작업은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쟁점이 생겼을때 송곳같이 날카롭게 꿰뚫고 나가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배우고 알려나가는 일은 멈추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국가의 탄생 이후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고 전자만 권리의 주체로 설정하는 ‘국민주의’ 담론이 부각되어 왔는데, 이을 넘어, ‘인간’을 주체로 긍정하고 관계를 풀어나가는 사회, 그 과정에서 ‘인종’이란 허구적 범주가 어떤 차별의 계기로도 등장하지 않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의 한 모습이라 믿는 어필도 긴호흡을 가지고 인종주의 문제에 대처하고 싸워나가기 위해 더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사회가 아무리 파시즘적 사회로 변모해나간다 하더라도, 피부색이 다른 모든 인간 역시 더불어 살아가야 할 또 다른 인간이지 절대로 경쟁자나, 적(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노정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입니다. 여러분들도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일 변호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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