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의 대표들이 경주에 모였던 10월 31일보다 조금 이른 10월 29일, 서울에서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남아시아에서 기업의 환경파괴와 인권침해에 대응해온 활동가들이 서울에 모였습니다. <아시아의 공급망 전반에서 연대 구축하기, 책임성 강화하기>라는 주제로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워크샵과 국제포럼이 진행되었고, 어필은 기업과인권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행사를 주관하였습니다.
이 행사는 2년 전 대만에서 열렸던 동아시아 기업과인권 워크샵과 작년 제네바에서 열린 동아시아 기업과 인권 관련 보고서 발행 행사의 후속 행사로, 한국의 기업과인권 네트워크와 일본의 Human Rights Now, 대만의 TTNC Watch의 공동주관으로 기획이 되었습니다. 이 세 국가는 아시아 다국적기업의 모국(home countries)으로, 아시아 전역의 공급망에서 인권환경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규제가 부족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에 한국, 일본, 대만 단체들은 아시아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의 책임 강화를 위해 특히 아시아 지역의 공급망의 맥락을 고려한 연대와 애드보커시 방안에 대해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동아시아 활동가 외에도 그동안 긴밀하게 활동해온 진출국(host countries) 활동가들을 초대해서 네트워킹을 확장하자는 취지로 이에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에서도 활동가들을 초대하였습니다. 또한 국가별 상황 공유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모색하고자 의류산업, 전자산업, 어업, 광업, ODA 및 금융 등 산업별 소그룹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약 2시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그룹 활동을 통해 열띤 토의와 유의미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제가 속했던 수산업 소그룹에서는 한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시민사회가 함께 자사의 수산물 공급망에 인권환경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기업에게 공급망을 공개할 것을 촉구하는 레터를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2일차에는 국회에서 진행된 공개 행사를 통해 산업별로 아시아 공급망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환경문제와 각국의 대응과 각국의 기업의 인권환경실사 등 기업책임 강화 및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 공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국회 행사에는 기업인권환경실사법을 대표발의를 한 정태호의원과 발의에 동참한 박지혜의원이 아시아 각국에서 참가한 활동가들을 환영하며, 아시아 최초의 실사법 제정에 대한 결의를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지는 각 세션에서는 배터리산업, 수산업, 반도체산업, 의류산업의 생산현장의 현실과 각국의 공급망이 이러한 인권환경문제와 어떻게 연결이 되고 인권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기술과 기업책임이라는 주제로 정보인권연구소 장여경 상임이사의 발제를 통해 AI의 활용으로 인한 잠재적, 실제적 인권문제에 대해 듣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각국의 현황 등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인터넷이 보편화되던 시점부터 디지털 권리를 개념화하고 명명화하는 작업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AI기본법에 “인공지능제품 또는 인공지능서비스에 의하여 자신의 생명, 신체의 안전 및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받는 자”를 영향받는 자로 정의하는데에 기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AI기본법에는 영향받는 자의 권리 보호와 관련된 구체적인 조항은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 AI에 특화된 규범 투명성과 책무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되었습니다.
장여경 상임이사는 기술에 대한 주권을 기업이 압도적으로 쥐고 있고, 기술이 자율적이고 가치중립적이라는 신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AI로 인한 권리 침해를 식별하고 대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가령 노사갈등이 있던 사업장에 사측이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순찰용 로봇개를 도입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로봇개로 인한 영향에 대해 노동자들이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관심도 부족하고 대응도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정보인권연구소에서는 피해자들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는 노동자들에게 이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문제의식이 있는 당사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당일 오후에 열렸던 다큐멘터리 무색무취 상영 및 대담 시간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색무취는 한국과 대만을 대표하는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병에 걸리거나, 아이를 유산하거나, 아이가 병에 걸리는 일을 겪은 산업 재해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피해를 접한 아시아 지역의 활동가들은 이은희 감독과 권영은 반올림 대표에게 많은 의견과 질문을 건넸는데, 그 중에 당사자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반올림 대표의 답이 장여경 상임이사의 말과 겹쳐 들렸습니다. 피해자들은 몸이 아프고 아이가 아픈 것에 대해 본인의 탓을 하지 설마 이렇게 좋은 회사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많고, 드물게 문제제기가 이루어져도 회사에서 무마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사자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반올림에서는 반도체 공장 노동환경의 위험성을 계속 알리고, 몸이 아플 때에는 반올림을 찾아오라고 - 반올림의 존재를 알리면서 당사자를 찾는 일을 계속해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서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방방곳곳을 다니며 피해자들에게 보이는 존재가 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지, 그 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었는지 생각을 하니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아시아를 비롯한 전세계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인권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총리에 대한 우려로 위축된 일본, 중국의 위협 속에 정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는 대만, 세계 곳곳에서 시민사회 활동의 자유가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초국적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가 탄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전망됩니다. 하지만 경주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당사자들을 찾아가고,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당사자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찾아내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도나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이야기했던 실뜨기가 생각났습니다.
해러웨이는 위기의 시대에 ‘트러블’로 지칭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대신, 여러 존재들과 함께 얽히고 배우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 얽히며 지식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로 실뜨기(string figure, SF)를 제안합니다. 실뜨기는 정답도 완성도 없지만, 상대가 건네는 실에 응답하며, 새로운 패턴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지식을 엮어내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주에 모였던 정상들이나 기업 총수들의 결정을 통해 세상이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기 어려운 이유는 이들과 마주 앉아 실뜨기를 하는 상상을 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3일 동안 만난 아시아의 활동가들은 인권침해와 환경파괴로 고통받고 있는 당사자들을 찾아가고, 찾아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통해 당사자들에게 실을 건네 받았고, 그리고 그 실은 서울에 모인 우리들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포럼을 통해 공급망의 가장 끝, 국경 밖의 인권침해와 환경파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피하지 않는 이들과의 연대를 이어갈 수 있다면 이는 또 하나의 멋진 SF(solidarity forum)가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잡한 공급망의 끝에 있는 사람들이 건네는 실을 건네 받고 또 서로 건네며, 이어지는 실뜨기를 통해 우리가 엮어낼 패턴을 기대하며, 아시아 지역에서의 연대의 한마당 SF가 지속되길 바랍니다.
(정신영 변호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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